1961년에 제작된 영화 ‘서울의 지붕 밑’에서 서울역(오른쪽 위 사진)은 미래를 향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간으로 표현됐다. 현재 서울역(왼쪽)은 ‘문화역서울284’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이 바뀌었지만 외형은 당시와 같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서울 도심 골목길(오른쪽 아래)이 정겹게 다가온다.
1961년에 제작된 영화 ‘서울의 지붕 밑’에서 서울역(오른쪽 위 사진)은 미래를 향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간으로 표현됐다. 현재 서울역(왼쪽)은 ‘문화역서울284’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이 바뀌었지만 외형은 당시와 같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서울 도심 골목길(오른쪽 아래)이 정겹게 다가온다.

- (77) 영화 ‘서울의 지붕 밑’ 배경…1960년대 서울

■ 서울역
母재혼 축복 아들과의 만남
활기찬 미래 향한 관문 표상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당시에도 도심의 랜드마크
50년간 같은외관으로 건재

■ 대폿집
서민 애환 달래주던 곳이자
결혼에 있어 신분 격차 상징

■ 골목길
과도기 시대 천태만상 세태
꿈·사랑·웃음·눈물 있는곳


영화 ‘서울의 지붕 밑’은 1960년대 초반 서울 풍경과 서민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1961년 12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이형표(1922∼2010) 감독의 데뷔작이다.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신영균, 도금봉, 황정순, 허장강, 김희갑 등 당대 톱스타들이 총출동했다. 또 구봉서, 곽규석, 강신성일 등의 젊은 시절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서울 도심에서 벗어난 골목에 자리 잡은 한의원 주인과 자녀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거미줄처럼 엮어놓았다. 당시 동아일보 영화 소개란에는 ‘서민가애환(庶民家哀歡)의 희화화’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 개봉 기사가 실려 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로맨스 빠빠’(감독 신상옥·1960년), ‘삼등과장’(감독 이봉래·1961년) 등 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가족 코미디물이 흥행했다. 6·25전쟁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국가 재건이라는 커다란 명제와 경제 발전에 대한 희망이 바탕에 깔린 영화들이다.

◇서울역·서울방송국= 1960∼1970년대 서울역은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는 사람들이 서울에 발을 들이는 첫 관문이었다. 조흔파의 소설 ‘골목 안 사람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서울의 지붕 밑’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탄탄한 플롯이 돋보이는 코미디다. 영화는 서울의 한 골목에서 한의원을 하는 김학규(김승호)의 큰딸과 작은아들의 혼사 문제를 중심 사건으로 두면서 골목 안에서 펼쳐지는 천태만상 세태를 다루고 있다. 지금 봐도 지루하지 않은 내용도 흥미롭지만 영화 곳곳에 보이는 서울의 주요 공간이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딱 한 차례 등장하는 서울역 전경은 당대 서울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김학규한의원에서 복덕방업을 하며 사는 노몽현(김희갑)은 장년의 나이에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된다. 가족도 돈도 없는 몽현은 친구인 학규와 박장의(허장강)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없는 놈이 별수 있나”라는 가벼운 신세 한탄으로 넘어간다. 이런 몽현은 처지는 전쟁 때 알게 된 문산댁을 만나면서 완전 딴판이 된다. 몽현은 8년 전 어린 아들을 데리고 피란생활을 하던 문산댁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몽현은 우연히 재회한 문산댁이 방을 구한다는 말에 오막살이지만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한다. 복잡한 절차를 생략한 둘의 빠른 결합은 주변 인물인 몽현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 부흥을 해야 하는 1960년대 초반의 시대 상황에서 건설적인 가정의 탄생이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영화 초반 서울 시내 전경을 훑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정부청사(아래) 모습. 미국 정부 원조로 주한 미국 대사관과 나란히 지어진 이 건물은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위)으로 변신했다.
영화 초반 서울 시내 전경을 훑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정부청사(아래) 모습. 미국 정부 원조로 주한 미국 대사관과 나란히 지어진 이 건물은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위)으로 변신했다.

몽현이 가정을 꾸리면서 가장 신경 쓰는 인물은 문산댁의 아들 영길(강신성일)이다. 25세의 공군 대위가 되었다는 영길의 소식을 들은 몽현은 대견하면서도 걱정한다. 평소 슬하에 소생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몽현은 아들이 생기는 것을 반가워했지만 영길이 반대할까 노심초사한다. 이런 모든 걱정을 한 방에 날리는 것은 서울역을 배경으로 영길과 문산댁이 만나는 장면이다. 영길은 어머니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기뻐한다. 전쟁통에 힘들게 살아남은 모자는 새로운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된 것이다. 꾀죄죄한 옷차림에 늘 궁상맞은 표정을 짓고 있던 몽현도 비단 한복을 입고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 몽현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문산댁에게는 남편이, 영길에게는 아버지가 생기게 된 이들의 결합은 완전한 가족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군복을 입은 젊고 늠름한 영길이 처음 등장하는 공간으로 서울역은 적절해 보인다. 엄마의 재혼을 한마디 반대 없이 인정하는 개방적인 아들과 미래를 향한 가능성과 활기찬 공기가 가득 찬 서울역 광장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학규 집안의 가장 큰 갈등이었던 큰딸과 작은아들의 혼사 문제는 학규의 서울 시의원 출마를 고비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해소된다. 시의원이 뭔지도 몰랐던 학규는 주변의 부추김에 넘어가 출마한다. 골목 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거지원단을 꾸리고 빚까지 내서 선거전에 뛰어든 학규는 8표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낙마한다. 패가망신했다고 생각한 학규는 유서를 써놓고 가출한다. 거리를 헤매던 학규는 때마침 시의원 당선자의 차량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당선 소감을 듣고 더욱 비참한 심경이 된다. 그렇게 떠돌던 학규는 놀이터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문에서 자신을 찾는 심인공고(尋人公告)를 보게 된다. “아버지 빚 다 청산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세요. 현구”라는 광고다. 사람을 찾는 광고를 신문에 내는 것이 요즘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과거에는 흔한 일이었다. 신문은 오랜 시간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 까닭에 광고 효과가 좋았다. 학규가 신문에서 광고를 보는 장면 앞에는 현옥과 현구가 서울방송국을 방문하는 모습이 나온다. 서울방송국은 1957년 12월 남산에서 개국한 현 한국방송공사 중앙방송국으로 신문을 발행하는 곳은 아니었다. 이런 장면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당시 방송국은 서민들의 고충을 접수하고 해결해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영화가 시작되면 서울 시내 전경을 멀리 내려다보며 한눈에 담아낸 화면이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옥 지붕,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시내 교차로, 도심의 높은 빌딩 등 서울의 대표적인 공간을 촬영한 화면들이 이어진다. 고층건물들로 들어찬 지금 시내 거리와 비교하면 한적할 정도지만 당대 관객들은 혼이 쏙 빠지게 바쁜 도심 스케치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서울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공간을 이어서 보여주는 이 오프닝에는 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모습도 한 컷 담겨 있다.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미국대사관 건물과 쌍둥이 건물로 건축되었다. 1961년 미국 정부의 원조로 지어진 이 건물은 처음에는 정부 신청사로 쓰이다가 문화체육관광부 건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50년 정도 비슷한 외관으로 건재했던 이 건물은 2012년 리모델링을 통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변신했다. 건물 안에 전시된 한국 근현대사만큼이나 건물의 변천사도 극적이다. 지금은 훨씬 현대적인 느낌으로 바뀌었지만 50년 가까이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게 놀랍다. 1961년 10월 30일 자의 ‘정부 신청사 낙성식’ 기념사진을 보면 건축 당시의 외관이 리모델링 전까지 같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지붕 밑’은 그해 12월에 개봉된 영화이니 아마도 후반 작업 직전까지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의 영화 제작 속도를 가늠할 수 있다.

◇미용실과 대폿집= 학규의 큰딸 현옥(최은희)은 아버지 한의원 옆 건물 2층에서 나하나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현옥을 좋아하는 최두열(김진규)의 최산부인과 의원은 미용실 바로 맞은편 건물 2층에 있다. 둘은 창문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키우지만 학규는 둘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다. 골목 안 모든 사람이 전쟁미망인인 현옥과 홀아비인 두열이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하지만 학규는 결사반대하는 입장이다. 학규는 두열을 자신의 권위와 생계를 위협하는 인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층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과 1층에서 소리치는 아버지의 대비는 이미 두 사람이 아버지가 말릴 수 있는 거리 밖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현옥과 두열이 처음 데이트하는 공간이 시발택시 안이라는 점도 의미 있다. 시발택시는 1955년 미군 지프를 개조해서 만들어진 교통수단으로 1962년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가 내놓은 새나라택시가 나오기 전까지 유일한 택시였다. 둘이 타고 있는 택시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은 서울 도심 거리를 빠르게 훑어낸다.

학규의 딸과 아들은 모두 아버지가 반대하는 연애를 한다. 현옥은 미망인이고 독립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 아버지의 반대가 심술 차원에서 펼쳐지는 정도다. 두열의 학식, 인품, 경제력이 학규보다 훨씬 월등하게 그려지고 있어 현옥과 두열의 결합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임을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학규의 작은 아들 현구(신영균)의 연애는 차원이 다르다. 현구는 골목에 있는 왕대폿집 외동딸 점례(도금봉)와 사귀는 사이다. 현옥과 두열과는 달리 현구와 점례의 사랑에는 계층이라는 커다란 장애가 있다. 지역 토박이 한의사 집 아들로 대학을 졸업한 현구와 대폿집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점례의 결혼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현구와 점례 본인들도 어른들의 반대를 예상하고 연애를 숨기고 있다. 대폿집은 골목 안 사람들이 늘 드나드는 푸근하고 편안한 공간이지만 점례의 혼사에는 걸림돌이 되는 공간이다.

현구와 점례의 혼사에는 감점 요인이 되었지만 영화 전반에서 대폿집은 서민들의 애환을 나누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학규와 그의 친구인 박 주사, 몽현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항상 대폿집을 찾는다.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대폿집 장면을 통해 당시 대폿집 실내 배치나 안주 차림표도 확인할 수 있다. 별다른 인테리어 없이 소박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대폿집 풍경은 규모에 상관없이 비슷한 모습이다. 돼지갈비, 떡만둣국, 해장국, 빈대떡, 냄비우동 같은 차림표도 거의 같다. 산부인과 의사 두열과 학규가 화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폿집 딸 점례도 최종적으로는 학규의 축복 아래 결혼식을 올리고 학규의 가족 구성원이 된다. 현옥과 두열, 현구와 점례의 결혼은 신구 문물, 가치관이 충돌하는 국면에서 새로운 조류에 손을 들어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과거 앙금이나 현재 계층을 떠나 사회 전체가 화합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긴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서울의 골목= 이 영화의 주 무대인 골목길은 정확한 동네명은 나오지 않지만 멀리 명동 성당이 보이는 걸로 미루어 서울 도심을 조금 벗어난 곳이 아닐까 싶다. 한옥과 양옥이 마주 보고 있는 골목 풍경은 전통 생활 방식과 서구적 과학 문명이 어우러지고 충돌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영화 도입부에 들리는 남성의 내레이션은 골목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설명한다. “서울의 지붕 위에 아침 해가 솟으면 오늘도 새로운 시대와 낡은 시대가 어깨를 겨누고 사는 이 골목 안에 서울의 희한한 꿈과 사랑과 웃음과 눈물이 살아서 숨결 짓는다”라는 말은 영화 전체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 골목 안 사람들의 사연과 시대의 풍경이 세밀하게 얽혀들어 훌륭한 풍속사가 완성된 영화다. 코미디 자체로 즐겨도 재미있지만 서울이라는 공간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로 보아도 흥미롭고 가치 있는 작품이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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