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꼴’. 1960년대 국내외적으로 아방가르드 바람이 한창일 때 국내 화단에서 활동을 펼치던 동인 모임이다. 논꼴은 서울 무악재 너머 홍제동 근처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홍익대 미대 출신인 강국진, 김인환, 양철모, 정찬승, 최태신, 한영섭 등 ‘해방 1세대’ 작가들이 모여 만든 이 그룹은 실험적인 성격의 작품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당시 이 멤버의 유일한 여성 작가가 남영희(74)였다. 대부분 동인 활동이 남성 작가 중심인 시대여서 여성 작가의 참여는 이례적이었고, 그래서 남 작가는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작업 현장보다는 교단 활동에 더 힘쓴 그는 거의 잊히다시피 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M갤러리(02-514-2322)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지만 미술평론가 등 몇몇 전문가 외에 일반 컬렉터들에게 그의 이름은 생소하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남 작가는 동인 멤버였던 한영섭(76) 작가와 1968년 결혼했고, 이후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일과 가사에 매달려 본인의 작업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미술 교사였지만 막상 내 작업은 취미생활 정도로밖에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제 나이 50세가 되던 해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내 평생소원대로 ‘밥 먹고 그림만 그려보자, 죽도록 해보자’고 다짐했어요.”
이후 남 작가는 한지를 이용한 판화 작업부터 시작했다. 서양화를 전공한 남 작가가 한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남편의 작업이 한지를 이용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집에서 작업할 때 아이들 건강을 위해서라도 오일 냄새가 독한 유화보다 한지가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5년간 판화 작업을 했지만 성과가 좋지 못했어요. 그래서 먹과 한지를 이용한 그림 작업을 새롭게 시작했죠. 그 과정에 먹에 황토를 섞는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의외로 결과물이 좋았어요.”
그의 작품에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5년 강원 원주의 뮤지엄산에서 기획전 ‘하얀 울림-한지의 정서와 현대미술’에 작품을 출품하면서부터다. 박서보, 김기린, 윤형근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남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뮤지엄산 관장으로 있는 오광수 평론가가 제 작품이 좋다고 하며 초청해 줬습니다. 저도 이제 화단에서 인정받게 됐다는 생각에 몹시 기뻤습니다.”
이후 화단의 호평이 이어졌다.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적당히 거칠고 질박한 느낌이 한지 고유의 물성을 강조하는 한편, 번짐 효과에 의한 비정형의 얼룩을 조성하기도 하고 황토를 먹, 안료와 혼합해 발라 마치 창호와 같은 은근하고 암시적인 분위기도 준다”고 평한다. 정문희 M갤러리 대표는 “한국적 추상인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 한지와 황토를 이용한 독특한 추상 세계를 개척했음에도 남 작가는 저평가돼 있다”고 말했다.
남 작가는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최근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작품이 먹과 황토를 이용해 한지의 물성을 드러낸 것이었다면 최근 작들에는 아크릴 안료가 추가되며 색감이 강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많은 분이 초기 작품이 좋다고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색감이 가미된 작품을 더 좋아한다”며 “작가는 계속 변해야 되고,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는 27일까지 계속되는 M갤러리의 전시는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 작까지 30여 점이 나와 있다.
그림에의 꿈을 잃지 않고 늦깎이로 화단의 인정을 받게 된 남 작가의 그림 여정은 일반인에게도 묵직한 감동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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