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논문으로 중국과 소련의 분쟁에 대해 썼던데 왜 그 주제를 택했나.
“중·소 분쟁은 유럽에서도 대중적이지 않은 주제지만 지식인 사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논쟁이었다. 왜 그런 갈등이 발생했나, 원인이 뭔가. (니키타) 흐루쇼프(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는 마오쩌둥(毛澤東·전 중국 국가주석)이 인도와 국경분쟁을 하는 것에 대해 지지하지 않았다. 마오는 소련이 자신을 지지할 줄 알았다. 그런데 모스크바는 ‘노(No)’라고 했다. 소련은 늘 인도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인도는 비동맹의 리더였고 소련의 군사장비를 수입하는 나라였다. 그러니 소련이 인도를 비판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이 일자 소련은 인도를 지지한 것이다. 그 반향으로 소련 제국의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지지를 옮기는 나라가 생겼는데 바로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작은 나라들이었다.”
―중·소 분쟁에 대한 유럽적 시각이어서 흥미롭다.
“중·소 분쟁은 소련 중심의 바르샤바조약기구(1955년 서방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결성에 대항하기 위한 동구권의 안보조약기구)가 부식되는 신호탄이었다. 소련의 리더십이 글로벌 수준에서 흔들리는 계기가 됐다. 소련에서 중국으로 관계를 옮기는 나라가 등장했고 글로벌 수준에서 소련의 리더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게 소련 붕괴의 첫 시작이었다고 본다. 흐루쇼프 등은 ‘우리가 글로벌 리더이고 우리가 세계 문제를 결정한다’는 입장이었는데, 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산권이 재구축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동유럽의 은둔국가로 알려진 알바니아 같은 작은 나라도 2차대전 때 독일군과 싸웠는데 그 후 소련 제국의 일원이 되지 않았다. 대신 중국의 마오 쪽으로 향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요십 브로즈) 티토(전 대통령)처럼 말이다. 알바니아는 자국 항구에 소련의 잠수함이 들어왔을 때 억류했다. 그런데 소련이 대응하지 못했다. 바로 알바니아 뒤에 중국이 있다는 것을 소련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소련 파워 쇠락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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