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건량 농촌진흥청 차장

농촌진흥청이 위치한 전주의 관광 핫플레이스는 단연 한옥마을이다. 닿을 듯 말 듯 오묘하게 중첩되는 기와지붕의 유려한 곡선이 500여 년 세월의 흔적을 들려준다. 거리마다 즐비한 맛집, 군것질거리는 여행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덤이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더워지면서 한옥마을 거리마다 맥주 한 잔을 들고 이른바 ‘길맥’(길거리 맥주)을 즐기는 관광객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순하고, 가볍게 한 잔 즐긴다는 젊은 층의 음주 취향이 번지면서 맥주마저 테이크아웃 문화를 이끌었다.

국민 대부분이 소비하는 맥주는 이른바 ‘공장 맥주’이다. 시장점유율이 높은 제조사 2곳에서 생산한 맥주가 시장을 석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평가를 듣고도 요지부동이던 기존 맥주 업계가 긴장할 날도 머지않았다. 국내 맥주시장에 수제 맥주 바람이 불면서 일반 맥주에 식상한 맥주 마니아들이 개성 있는 맥주를 찾아 맥주 기행을 떠날 정도다. 2014년 주세법 개정 이후 중소 전문 맥주 공장의 등장과 수제 맥주의 외부 유통이 허용됐다. 실제로 일부 대형 할인 마트와 편의점에서 지역 맥주를 시리즈로 선보이거나 수제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판매 순위에서도 대형 맥주회사의 제품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수제 맥주 수요가 증가한 데 따른 유통업계의 발 빠른 대응이다.

2016년 수제 맥주 업체의 출고량은 약 3500㎘로 집계됐다. 수제 맥주 시장 규모는 2012년 7억 원에서 2018년 100억 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6년 기준, 발효조 규모가 75㎘ 이하인 소규모 맥주 제조장은 90여 개이다. 올해 2월, 정부는 소규모 맥주 제조업자가 소매점에서도 맥주를 팔 수 있도록 맥주 제조 면허 관련 규제와 맥주에 제한된 주류 원료 규제를 풀기로 가닥을 잡았다. 현재는 엿기름, 밀, 쌀, 보리, 감자만을 맥주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주류의 품질이나 식품위생에 문제가 없는 한 발아된 맥류, 녹말이 포함된 재료 등을 쓸 수 있도록 주류 원료와 첨가물을 확대하기로 했다.

현재 맥아(싹을 틔운 보리), 홉, 효모 등 맥주의 원료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이 재료들은 맥주의 품질이나 생산량에 영향을 준다. 우리나라의 연간 맥아 수입량은 28만t이며 이 중 약 5%인 1만6000t이 수제 맥주 제조에 사용된다. 수제 맥주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맥아와 부원료 일부를 우리 쌀로 대체할 경우 고정적인 쌀 소비처가 마련돼 농가소득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농촌진흥청은 쌀가루 전용 품종인 ‘한가루’를 이용해 맥아의 40%를 대신한 ‘쌀맥주’를 만들어 맥아 100%인 수제 맥주와 비교해 맛 평가를 했다. 시음 결과 쌀맥주가 ‘깔끔하고 목 넘김이 부드럽다’는 의견이 많았다. 또한, 공장 맥주와 시판 중인 수제 맥주와 비교한 기호도 평가에서도 우수한 점수를 받아 시장 진출 가능성을 확인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수입 유명 맥주도 함량 차이는 있지만, 제조 과정에서 쌀이 일부 첨가된다. 전북 고창의 국산 보리 맥주 업체에서는 국산 쌀 20%가 함유된 새로운 맥주를 만들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쌀맥주는 쌀 소비의 새 활로이자 우리 고유의 맥주 문화를 만드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교육자로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증거가 바로 맥주’라며 맥주 예찬을 펼쳤다. 누구에게나 맥주 한 잔의 여유는 행복을 부르는 마법 같은 시간이다. 맥주로 거듭나는 쌀의 화려한 변신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쌀맥주 전성시대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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