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국제부장

지난 열흘 문재인 대통령의 출발은 비교적 산뜻했다. 전임 대통령으로 인한 어둠이 워낙 짙었기에, 대조적 행보가 상대적으로 더 밝게 보인 측면도 있을 것이다. ‘노무현 시즌2’를 우려했던 비(非)지지자들은 ‘탈(脫)코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특히, 안보·외교 분야에 ‘진보 이념’이 앞서 미국·일본과 대립하고, 북한·중국과 접근하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이 많다. 실제로 공약 중 상당수가 그렇고, 외교·안보 인맥에 그런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사드(THAAD) 배치 재검토, 전시작전권 임기 내 전환, 한·일 위안부 합의 재협상, 개성공단 재가동 등을 제시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가속화하면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공약을 곧이곧대로 관철하려 들 경우 국내외적으로 논란이 클 수밖에 없다. 한·미 동맹엔 균열이 생기고, 국론은 두 동강 날 것이다. 야당의 지리멸렬이 문 대통령에게 꼭 유리하지도 않다. 선명 경쟁이나 강경 투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미 관계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로 불확실성이 커졌다. 한국이 사드 비용을 부담했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에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전작권 전환 문제를 꺼낼 경우 한·미 관계는 노무현-조지 W 부시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 당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전작권 협상에서 감정이 틀어지자 주한미군을 아예 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현재와 같은 북핵·미사일 위기상황에서 사드 철수나 전작권 협상을 어젠다에 올릴 경우,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이다. 러시아 스캔들로 탄핵 위기를 맞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정국 돌파를 위해 대외 정책에서 위험한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전반적 상황이 험난해 보이지만 문 대통령 앞의 선택지는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외교·안보 분야에 관한 한 ‘이념’을 던져버리면 된다. 대선 기간에 지지층 결집을 위해, 지난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내놓은 공약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노 정부 당시 ‘자주파’로 불리며 한·미·일 동맹보다 남·북·중 관계를 중시하던 측근들을 멀리해야 한다. 공약과 캠프는 대선의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과 같다. 강을 건너는 소임을 했다면 이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엄중한 외교·안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해 새 플랜을 짜야 한다. 오직 국익만 생각하며, 현실주의에 입각해 5년간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보수·진보를 떠나 미국과 중국, 일본을 가장 잘 아는 드림팀으로 인선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2011년 펴낸 자서전 ‘운명’에서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쓴 ‘대통령의 성공조건’을 노무현 정부 초기에 참고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바 있다. 박 교수가 보수의 집권에 대비해 쓴 책을 진보 정권의 교과서로 활용했다는 것은 문 대통령이 좌우에 얽매이지 않는 실사구시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과거엔 노 전 대통령의 참모로서 그 책을 읽었지만 이제는 한국호의 키를 쥔 선장으로서 노무현 정부 때의 과오를 반면교사 삼아 성공전략을 세워야 한다. 불행히도 노무현 정부 때엔 자주파-동맹파 논란이 벌어지면서 5년 내내 시끄러웠다. 그런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당시 논란의 주범이었던 ‘386탈레반’들은 핵심 요직에서 배제해야 한다.

오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되는 날이다. 우연이지만, 그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처음으로 재판정에 서게 된다. 촛불 세력과 태극기 세력 모두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런 분열의 칼날 위에 서 있다. 41%의 열광 뒤엔 59%의 냉담함이 깔려 있다. 안보 국론 분열은 반대 세력을 결집시킬 가장 강력한 촉매다. 문 대통령은 ‘운명’에서 “이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 성공은 성공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뛰어넘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선 ‘노짱 대리인’이 아니라 첫째도 실용, 둘째도 실용 정신으로 국가를 이끌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반미면 어때” 식으로 혈기를 과시하려는 소수의 지지층에 충성할 게 아니라, 당면한 북한 핵·미사일 위기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낮추며 한·미·일 외교·안보 협력 공간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게 바로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는 길이다. 안보에는 이념도, 임기도 있을 수 없다.
이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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