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모의 도시 건축으로 보는 서울 - ② 을지로·남대문로 상가주택
개항 이후 141년, 대한제국 출범 후 120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69년이 지나면서 서울의 모습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개항 이후 서양 건축을 적극 받아들였고, 일제강점을 겪으며 일본화된 서양 건축이 본격적으로 이식되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쳐 오늘에 이르면서 서울의 모습은 빠르게 변화해 왔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겪으며 변화가 주춤했지만 지난 10여 년 사이에 서울 도심의 모습은 다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무엇이 도시를 변하게 할까? 우리 격동의 근현대사 중심에는 개항과 식민지 그리고 정변과 경제개발이 있지만, 이러한 굵직한 사건의 이면에는 전쟁이 자리하고 있다. 개항의 이면에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있었다.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배경에는 러·일전쟁이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광복을 맞이했지만 곧 이은 6·25전쟁으로 우리의 허리는 잘렸고 서울은 파괴됐다. 휴전 후 고착된 분단체제하에서 또 다른 전쟁인 냉전으로 남과 북의 도시는 각기 다른 모습을 만들어 왔다.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국내외의 전쟁은 나라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동시에 도시의 모습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오늘의 서울은 600년 역사도시의 산물이지만, 지난 100여 년 동안 이 땅에서 전개된 근현대사의 현장 곳곳에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지난 회의 ‘세운상가’와 오늘 다루는 ‘상가주택’은 우리가 겪었던 가장 최근의 비극적 전쟁이었던 6·25전쟁의 흔적을 안고 있는 건축이다.
우리 정부는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내주었다가 1950년 9월 28일 되찾았다.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었다가 같은 해 3월 16일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그러나 정부가 서울로 돌아온 것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인 9월 25일이었다. 정부환도 이전에 서울시 행정건설대의 역할이 있었다. 행정건설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재(戰災)지역에 대한 조사였다.
‘전재표시지도’는 6·25전쟁으로 도심 곳곳이 피해를 입었음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거쳐 서울시청에 이르는 지역, 종로2가 관철동, 종로5가 광장시장 그리고 을지로 3가 일대와 묵정동 일원이 큰 피해를 입었다. 전재표시지도를 바탕으로 전재복구사업계획이 수립되었고,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진행된 전재복구사업은 ‘전재복구사업 표시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서울시의 입장에서 전재복구의 가장 큰 관건은 도시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주택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도시경관 측면에서는 간선도로변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서울시의 해법은 ‘상가주택’이었다. 상가주택은 아래층에는 상가, 위층에는 주택이 위치한 건물을 말한다. 오늘날 점포주택이나 주상복합빌딩의 원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상가주택은 전재복구의 마지막 정책이자 수도서울의 위상에 맞는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1958년 7월 3일자 한 일간지에는 시내 간선도로변에 4층 이하 건물의 신축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입장이 보도되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가장 번화했던 태평로(현 세종대로)에서 높은 건물이 3~4층, 종로와 을지로 변에는 2층이 일반적일 때, 4층 이하의 건물 신축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은 매우 의욕적인 전재복구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일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갈월동에서 세종로, 세종로에서 동대문, 시청 앞에서 을지로6가 그리고 남대문에서 한국은행 앞을 거쳐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에 이르는 4개 간선도로가 대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1·2층에는 상가 또는 사무실, 3·4층은 주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짓겠다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귀속재산 적립자금에서 10억 환의 예산을 확보하여 도로에 면한 대지에 상가주택을 건설하는 사람에게 건축자금의 일부를 지원하여 400가구를 건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후속 기사에 따르면 신청 마감을 5일 앞둔 7월 11일까지 한 명의 신청자도 없어 사업의 성사가 회의적이었다. 비록 1958년의 계획이 소정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 사업은 1959년에도 지속되어 1960년 6월 29일에는 44건이 준공됐다. 사업은 지지부진했지만 상가주택이 간선도로의 미화를 위한 바람직한 해법이었다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었던 듯하다. 1959년 12월 12일에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구간인 한강다리에서 영등포구청 앞까지의 구간을 상가주택 건설지구에 포함시켰다.
당시 대한주택영단(현 LH토지주택공사)에서 발행한 ‘주택’잡지 창간호에는 상가주택이 어떻게 지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대한주택영단 이사장이었던 김윤기의 ‘상가주택이란?(Combined Building for Store and Dwelling House)’이라는 글에 담겨 있다.
상가주택은 시범상가주택과 일반상가주택으로 구분됐으며, 건축주가 상가주택 건설을 서울시에 신청하면, 시는 보건사회부에 추천하고 융자가 결정되면 대한주택영단에서 설계검토를 거쳐 지어졌다.
상가주택건축 요강은 다음과 같다. ①구조는 4층 이상의 철골 또는 철근콘크리트구조로 한다. ②1, 2층은 점포 또는 사무실 3층 이상은 주택으로 한다. ③벽체는 내화구조로 한다. ④바닥과 지붕은 내화구조로 한다. ⑤도로정면은 주요간선도로에 상응한 미장을 하여야 한다. ⑥전기 급배수시설을 하여야 한다. ⑦비상계단을 설치한다(계단의 폭은 4척 이상으로 한다) ⑧간선도로면에 연통을 세울 수 없다. ⑨변소는 수세식 또는 수세식에 준한 미장을 하여야 한다. ⑩옥상을 이용할 때는 난간을 설치하여야 한다. ⑪주택부분에는 따로 변소를 설치한다. ⑫‘다스트슈-트’를 설치하여야 한다. ⑬ 3, 4층 주택에는 세대수와 동일 수의 변소를 설치하여야 한다.
13개 항목으로 구성된 ‘상가주택 건축요강’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지만, 60년 전의 시대 상황과 주택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던 것은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물이 주택의 대부분을 차지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가주택은 반드시 철근콘크리트로 짓도록 했고, 간선도로 변의 도시미화를 위해 보기 좋게 꾸밀 것이 요구되었다. 당시에는 보편적 난방 수단이었던 난로에 필수적이었던 연통을 대로변에 설치하지 못하게 했다. 가장 주목할 것은 3, 4층에 위치한 주택에는 ‘세대수와 같은 숫자만큼의 변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지금은 주택에서 공동변소(화장실)를 상상할 수 없지만, 1960년대 말에 지어진 청계천변의 삼일아파트에도 개별 주택에 화장실이 설치되지 않고, 공동화장실이 설치된 아파트가 지어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959년에 건축되는 상가주택에서 주택에 반드시 화장실을 설치하라는 조항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다스트슈-트(dust chute·쓰레기 투입구)’ 설치 조건도 눈에 띈다. 지금은 위생상의 문제로 모든 아파트에서 다스트슈-트가 사라졌지만, 고층건물에서 쓰레기를 아래로 버리는 시설인 다스트슈-트는 오랫동안 아파트에서 위생적인 쓰레기처리를 위한 현대적 해법으로 인식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만들고, 설계안을 만든 이들은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를 형성했던 김중업, 엄덕문을 비롯한 지순 등 후속 세대였다. 건축이 문화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 대한주택영단 설계실은 한국현대건축가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상가주택 중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화제의 건물은 남대문로에 위치한 시범상가주택(현 흥국생명빌딩)이었다. 육군 공병에 의해 건축된 건물이 사유화된 것이 국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당시 공병감이었던 엄홍섭과 5·16군사정변 후 내각 수반이었던 송요찬은 이 공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8군에서는 상가주택 건설에 공병을 동원하는 것을 반대했었는데 대통령의 명령으로 사업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당시 전후복구사업에서 공병이 동원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민간에서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현대적 건설장비를 공병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을지로와 남대문로 상가주택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다. 남대문로 동측의 상가주택 상당수가 이미 철거됐으며, 나머지 건물들도 언제 철거될지 모른다. 전후복구가 시급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지어진 건축이라 여느 철근콘크리트 건축에 비해 튼튼하지 못한 것도 요인 중 하나지만, 건축의 사회적 수명, 물리적 수명보다 경제적 수명이 운명을 좌우하는 자본주의 시대 건축의 운명이기도 하다.
다행히 역사도시 서울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조선의 역사뿐 아니라 근현대의 역사까지 품에 안고자 하는 서울시의 노력으로 소리 없이 사라질 뻔했던 상가주택 몇몇에 대해서는 재개발 시 상가주택의 일부 또는 옛 흔적을 보존하는 다양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어 일부 상가주택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보이기도 한다.
번듯하지 않을지 몰라도 어려웠던 시절 도시재건의 비전과 주거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던 해법을 담은 도시건축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도시생활사를 증거하는 삶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오랜 시간과 삶이 적층된 공간은 세대를 초월한 모든 시민의 기억저장소이자 공유공간이라는 점에서 상가주택의 존재는 소중하다. (문화일보 4월 19일자 24면 1 회 참조)
안창모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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