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2000년 전, 중국산 비단옷은 카르타고와 지중해 지역의 다른 도시들에 사는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입었으며, 남부 프랑스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잉글랜드와 페르시아 만 지역으로 흘러들어갔다. 인도의 향신료와 양념이 신장(新疆)의 부엌뿐 아니라 로마의 부엌에서도 사용되었다. 북부 아프가니스탄 건물에는 그리스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세계는 서로 연결되고 복잡하고 교류에 목마른 곳이었다.”
유럽에 도시 같은 것이 생기기 전인 5000년 전에 이미 인도 북부와 중앙아시아에는 수만 명의 인구가 몰려 살면서, 정교한 하수 처리시설을 갖춘 거대 도시들이 있었다. 지구의 배꼽은 이 지역이었다. 여기에서 농경이 시작되고 문명이 발원했으며, 문자가 만들어지고 역사 역시 시작되었다. 유사 이래 수천 년 동안, 이 지역을 장악한 세력이 세계의 목줄을 쥐었다. 고대에는 그리스와 로마와 페르시아가, 중세에는 이슬람 제국들이, 근대엔 서구 제국들이 끝없는 영화를 누렸다. 물론 제국의 힘이 약해지거나, 주변의 힘이 비대해질 때마다 피가 넘치는 전쟁과 끔찍한 살육이 줄을 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와 이슬람이 중앙에서 부풀어 오르고, 그리스와 로마가 힘을 다해 동진하고, 중국의 역대 왕조가 서진으로 호응하며, 인도의 통일된 힘이 때때로 북진하여 끼어들고, 초원의 유목제국들과 그 배후에 있는 강인한 북해 사람들이 남진하여 자리를 잡는다. 그들 사이를 소그드 상인, 아라비아 상인, 유대 상인, 바이킹 상인 등이 연결한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도시들이 동양과 서양 사이에 알알이 늘어서서 문명의 교차로를 진주처럼 빛낸다. 도시의 변화무쌍한 삶에 불안을 느낀 이들이 종교를 세운다.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유교, 도교 등. 그러고 보면 세계화도, 현대성도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은 이를 가속화했을 뿐, 인류는 본래부터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실크로드 세계사’에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자 최후의 꿈자리인 제국과 종교와 경제(돈)가 한꺼번에 서술되면서, 지구 표면 전체를 덮는 태피스트리를 짠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지역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지역에 영향력이 있어야 배를 통해 인도 남부에 닿고, 거기에서 다시 인도차이나의 여러 제국들로, 마지막에는 필리핀을 거쳐서 중국 남부와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이르는 항로를 통해 세계 전체를 하나로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정복이라는 번영을 향한 욕망과 교역이라는 평화를 위한 갈망이 서로를 향해 끝없이 씨줄을 대주는 생생하고 웅장한 드라마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그동안 산만하게 읽었던 중국, 그리스, 로마, 인도, 페르시아, 러시아 등에 대한 무수한 책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바다를 이룬 느낌이다.
해상 운송 기술이 발전하면서 희망봉이 발견되고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지구사에 강제로 참여시킨 후에는 세계사의 밑그림이 놀랍도록 복잡해진다. 부를 축적하는 통로가 열리면서 지구의 배꼽이 슬쩍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 결과가 유럽과 미국을 지반으로, 즉 지중해와 대서양을 중심으로 ‘날조된’ 세계사이자 오늘날의 엄연한 국제 질서다. 이 세계사에서는 중앙아시아가, 인도 아대륙이, 인도차이나 문명이, 시베리아의 초원지대가, 동아시아의 역사가 통째로 사라지거나 극도로 축소된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지구의 배꼽이 또다시 동쪽으로 이동한다. “세계의 중심부에 있는 비옥한 땅과 모래, 그리고 카스피 해의 물 속에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검은 황금인 석유, 막대한 규모의 지하자원, 풍부한 식량을 생산하는 대지가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민족주의로 각 지역의 자주성이 거의 회복되는 와중에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무능이 폭로되었다. 러시아의 북방수송로, 중국의 일대일로 등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세계질서를 향한 용틀임이 시작된 것이다.
‘실크로드 세계사’는 역사의 재발견에 초점을 둔 ‘구닥다리 세계사’가 아니다. 오늘날 세계가 움직이는 ‘거대한 게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별자리를 제공한다. 25장 ‘비극으로 가는 길’은 정부의 외교 담당이나 기업의 해외 전략팀 등에서 반드시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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