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앞둔 공기업 간부의 ‘내 집 짓기’
중년에게 가장 큰 로망은 바로 ‘내 집 짓기’ 다. 한국의 중년의 뿌리는 대부분 농촌에 있다. 실제로 고향이 농촌이 아니더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누구든 한두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농사짓고 사는 삶’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중년에게 시골살이에 대한 꿈이 강력한 건 그래서다. 꿈꾸는 전원에서의 삶이 ‘언제’ 실현될지, 아니 그게 ‘진짜’ 실현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지금부터는 ‘중년의 내 집 짓기’에 대한 이야기다. 줄곧 도시생활을 해온 중년에게 집을 짓는다는 건 용기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로는 후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집을 짓는 과정에서 용기가 건져 올린 건 무엇이고, 후회로 남은 건 무엇일까. 은퇴를 코앞에 둔 한 공기업 간부의 집 짓기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1 “공기·물 좋은 곳서 살고 싶다”… 癌수술 아내의 바람
그의 집 짓기는 아무런 준비 없이 돌연히 시작됐다. 임기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이재성(59·한국관광공사 상임이사) 씨. 1985년 한국관광공사 입사. 말단 직원에서 시작해 한때 부사장 겸직 직위까지 올라봤으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최선의 코스를 달려온 셈이다.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여기까지 잘 달려왔다.
사실 그는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집 짓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충남 논산과 홍성에서 유년시절을 보내 그저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정도의 막연한 꿈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은퇴를 앞둔 대한민국의 중년이라면 이런 사정은 다 비슷하리라.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러니까 2011년 9월의 일이다. 이 씨는 새벽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아내 황영애(56) 씨를 병원에 내려주고 출근했다. 그런데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의사가 ‘간단한 처치’가 필요하다고 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오전 10시. 다시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보호자를 찾았다. 청천벽력. 아내 몸에서 암 덩이가 자라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의사는 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간 지 4시간 만에 아내는 암 환자가 되고 만 것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은 뒤 퇴원한 아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죽기 전에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했다. 땅을 사놨기를 했나, 집 짓기를 알기나 하나…. 아내와 함께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는 했지만 무엇 하나 준비해 둔 것이 없었다. 이 씨는 “암 환자가 된 아내에게 무엇 하나 해줄 수 없다는 게 가슴이 아팠는데, 막상 아내가 원하는 걸 얘기했는데도 그걸 해낼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내의 전원생활에 대한 꿈을 이뤄줘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2 “노후자금을 왜 시골집에 쏟아붓냐”… 주변 사람들의 만류
집 짓기의 결심은 섰지만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적당한 땅을 고르고, 양심적인 건축업자를 정하고, 치밀하게 설계도면을 그리고…. 마음은 바빴지만 단번에 이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장 일이 바빠 땅을 보러 다닐 여유부터가 언감생심이었다. 건축업자는 다 믿을 수 없었고, 설계도면은 봐도 봐도 눈에 익지 않았다. 집 짓기 공사 인부를 관리하는 일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씨는 고심 끝에 펜션 건축과 운영 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지인이 강원 횡성에 경매로 받은 산이 있다고 했다. 경매받은 땅에다 마음 맞는 이들이 모여 함께 집을 짓자고 권했다.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이 씨는 몰랐다. 이렇게 고마웠던 지인과 나중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사이가 될 줄은….
시골 땅에 집을 짓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의 만류가 시작됐다. 시골에 가 있던 사람들도 정리하고 도시로 들어오는 판에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퇴직은 다가오는데 노후자금이 풍족하다면 모를까, 노후생활에 쓸 돈을 집 짓기에 쏟아 넣으면 어떻게 살 거냐는 조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우려는 맞았다. 집을 다 짓고 2년이 지났지만 은행 대출로 충당한 3억 원의 절반 이상이 빚으로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집 짓기를 ‘천 번 만 번 잘한 선택’이라고 했다. 아내가 원하던 전원생활을 선물할 수 있었던 것을 빼고도 그렇다고 했다.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청량한 공기, 그리고 이웃과 교분을 나누는 전원의 삶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하자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조바심도 사라졌다고 했다.
#3 “집을 처음 지어 모르는 모양인데”… 눈치보게 만든 업자들
이제 그의 본격적인 집 짓기 과정을 들여다보자.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해도 기간이며 비용까지 애초의 계획과 단 하나도 맞아들어가지 않는 게 집 짓기다. 지인은 “두 달 만에 집을 다 짓겠다”고 호언했다. 되돌아보면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게 가장 큰 실책이었다.
공사 기일은 늦춰졌고, 공사가 늦어지면서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설계부터 완공까지 160㎡(약 49평)짜리 이층집을 짓는 데 필요한 예산을 계산해보니 2억 원이 조금 넘는 수준. 아무리 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해도 3억 원이면 차고 넘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으로도 턱없이 모자랐다. 돈도 돈이지만, 더 힘들었던 건 집을 짓는 내내 계속된 갈등이었다. 갈등은 설계 과정부터 시작됐다. 설계사와 건축업자들은 매번 ‘처음 집을 지어서 모르시는 모양인데…’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렇게 바꾸면 비효율적이다, 저렇게 요구하면 돈이 많이 든다며 난색을 표했다. 설계부터 건축까지 업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쉽게 짓자’는 것이었다.
집을 짓다가 다 지은 벽체를 뜯어낸 적도 있다. 벽체와 지붕이 만나는 부분의 몰딩을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다 해놓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아내를 달래던 이 씨는 그날 밤 아내가 한숨도 못 자는 모습을 보곤 건축업자를 찾아갔다.
“돈이 얼마가 더 들어도 좋은데 이건 안된다”고 막아섰다. 결국 다 뜯어내고 재공사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이때부터 아내 황 씨는 공사장 인부들로부터 ‘까다로운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내 돈 내고 내 집 짓는데도 인부들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4 “두달이면 끝난다더니”… 시행착오·갈등 끝 4년만에 완공
서울에서 집을 짓는 횡성까지 가자면 양평을 지나게 되는데, 이 씨는 국도변에 손글씨로 ‘철근 팝니다’라는 글을 적어놓고 세워둔 트럭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필시 공사장 어디선가 빼돌린 철근일 것이었다. 거길 지날 때마다 이 씨는 ‘혹시 나처럼 집 짓는 공사장에서 철근을 빼돌려 파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거듭된 요구가 거절되고,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 하자 의심은 의심을 낳았다.
두 달이면 끝난다던 공사는 한없이 길어졌다. 외벽에 돌을 붙이던 서울에서 온 인부들은 ‘일이 힘들다’며 가버렸고, 유리창을 달던 인부들은 ‘돈을 더 달라’며 공사를 중단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완공할 수 있다던 공사가 해를 넘겨 계속됐다.
공기 단축의 다짐을 받아도 약속은 하나 마나였다. 지인과의 갈등도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가장 야속했던 일은 완공도 안 된 집에 사돈댁을 초대하곤 진입로 포장을 부탁했을 때의 일이다. 추가 대금을 요구하길래 급한 마음에 1000만 원을 쥐여주고 사정했지만 딱 하루 와서 포장공사를 하는 시늉만 하고는 돌아가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공사 뒤처리도 엉망이었다. 마당 한쪽에 나무를 심으려는데 땅에 삽날이 안 들어갔다. 파보니 인부들이 집 짓다 남은 시멘트를 죄다 땅에 부어 묻어두고 간 것이었다. 지뢰밭을 딛듯 위태롭게 공사를 이어가며 천신만고 끝에 집을 다 짓고 준공검사를 받은 게 2015년 말이었다. 집짓기를 결심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5 “좋은 집은 생각을 바꾼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전원생활
이 씨는 집을 다 짓고 난 뒤에 돌이켜보니 갈등의 절반 이상이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만든 것이란 걸 깨닫게 됐다고 했다. 새집에서 살아보니 집 짓기를 맡겼던 지인도 애초에는 성의껏 집을 지으려 애썼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 수시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이었다.
고된 집 짓기 끝에 1년여 전부터 새집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이 씨는 “전원생활이 더없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우선 ‘인구 늘리기’ 정책 때문인지 이사 온 타지 사람에게 횡성군과 횡성군 산림조합은 황송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우려했던 마을 주민들의 텃세도 마음을 여니 금방 극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진입로에 바리케이드까지 치고 집 짓기를 막아섰던 이웃이 이제는 집 앞에 갓 딴 두릅을 가져다 놓고 가고, 상추 모종과 고추 모종도 나눠준다. 이 씨 부부는 이웃 주민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식사를 겸한 모임을 갖고 ‘여행계’를 붓고 있다
마을 주민들과 가까워진 비결로 이 씨는 ‘처음 이사 와서 이웃에게 들은 한 가지 충고’를 들었다. 그 충고란 “농사일로 한창 바쁠 때 부부가 운동복 갖춰 입고서 운동한다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얘기였다. 이 씨는 인근의 귀농한 한 아주머니 얘기를 들려줬다. 고된 집 짓기로 앓아 누웠는데 손님들의 방문이 잦자 마을 아주머니에게 “섭섭하지 않게 비용을 드릴 테니 청소만 해주실 수 있겠냐”고 물었단다. 그랬더니 육두문자의 답이 돌아왔다. “저 ×이 이제 나를 파출부로 안다”는 것이었다. 조심스러운 부탁이 그만 이웃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이웃 주민이 집 앞 도로 옆에 축사를 지었다. 그걸 놓고 이 씨는 아내와 ‘회의’를 했다고 한다. 부부가 내린 결론은 “마을 사람들에게 축사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말자”는 것이었다. 서로의 생계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지내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생각만큼 불편도 크지 않았다. 도시에서라면 이럴 수 있었을까. 이게 모두 다 ‘집’이 바꾼 것이다. 좋은 집은 생각을 바꾼다. 그게 이 씨의 요즘 생각이다.
횡성 =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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