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년 만에 칸 레드카펫 밟은 설경구
지난 24일 늦은 밤(현지시간) 프랑스 칸 뤼미에르극장 앞에 깔린 레드카펫으로 배우 설경구와 임시완, 전혜진, 김희원 등 제70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진출한 영화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불한당) 출연배우들이 걸어 들어왔다. 4명의 배우는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연신 터지는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특히 설경구는 후배들을 지휘하며 한국 배우의 멋과 흥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 영화 연출자인 변성현 감독이 국내에서 트위터 내용 논란이 일어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설경구는 ‘아버지 없는 집안의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모습이 조금 과장돼 보였다. 극장 입구에서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영접을 받은 후 뒤쪽에 서 있던 박찬욱 감독을 알아보고는 달려가 격한 인사를 했다. 영화 상영 후 극장 안은 관객의 기립 박수와 환호성으로 달아올랐다. 설경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배들과 함께 손을 흔들고 하트 포즈를 취하며 관객의 뜨거운 호응에 답했다. 약 7분간 기립 박수가 이어질 때쯤 그의 눈이 붉어졌고,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호”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쏟아지는 눈물을 삼켰다.
인터뷰 = 김구철 부장(문화부)
25일 프랑스 칸 르 그레이 달비옹 호텔에서 문화일보와 만난 설경구는 특유의 여유를 되찾은 표정으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오랜 시간 절치부심하며 지낸 그는 17년 만에 칸에 와서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했다. ‘나의 독재자’(2014년)에서 김일성 대역을 연기하는 연극배우 역을 맡아 바닥까지 긁는 진한 연기를 펼쳤지만 흥행에 참패했고, 이어 ‘서부전선’(2015년)과 ‘루시드 드림’(2017년)까지 연이어 부진한 성적을 냈다. 그러면서 강렬하던 그의 존재감도 희미해졌다.
힘이 빠진 그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창피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던 그가 ‘불한당’을 통해 예전의 날 선 느낌을 살려냈고, ‘박하사탕’(2000년·감독주간) 이후 처음으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뤼미에르극장에서 왜 울컥했냐”고.
“만감이 교차했어요.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더 나올 게 없이 소모되고 바닥난 느낌이었어요. 또 감독 없이 배우들만 영화제에 온 게 부담스럽게 다가왔고요.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데 수많은 관객이 일어서서 박수를 쳐주는 모습을 보고 뭉클했죠. 상영 중에도 환호성과 박수가 나와서 들떴는데 영화가 끝나고 기립 박수가 이어지며 감정이 올라오더라고요. 칸에서는 항상 박수가 많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2분, 5분, 7분 계속 이어졌고, 2층 객석에서도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극장 분위기가 제 몸을 감싸는 듯 포근한 느낌도 들었고요. 흐르는 눈물을 삼키려고 소리를 질렀죠. 그때 제가 눈물을 쏟아냈으면 한 2분쯤 박수가 더 나왔을 것도 같은데 아쉽네요. 하하.”
배우가 계속 잘나갈 수는 없고, 기복이 있는 게 오히려 당연한데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제가 출연한 영화의 완성도가 마음에 안 차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자칫 잘못 말하면 감독을 욕하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요. 다 제 잘못이에요. 장면 하나하나는 배우가 만드는 거예요. 매번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살인자의 기억법’(2015년 10월 촬영 시작)과 ‘불한당’(2016년 8월 촬영 시작)을 찍으며 심각한 상황에서는 벗어난 것 같아요. 물론 모두 해소된 건 아니죠. 제 성격이 어디 가나요(웃음). 아닌 건 아닌 거니까요.”
세계 최고 영화제로 자리 잡은 칸영화제가 대단하긴 한 것 같다. 실의에 빠져 있던 설경구에게 다시 힘을 실어줬으니….
“‘박하사탕’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칸에 왔어요. 그때 기억이 다 잊혔는데 시내 뒷길을 다시 걷다 보니 희미하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러면서 뭔가 제 자신을 다잡게 됐고, 막연한 희망이 생겼어요. 다음에는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입으로 먼저 떠들면 안 되는데… 하하.”
그는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순간순간 열심히는 해요. 그런데도 꽉 막혀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완성본을 보고 나면 답답해져요. 그러면 또 제 자신을 책망하게 되고요. ‘불한당’도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제가 호흡을 너무 길게 가져가서 처지는 느낌이 들어요. 다른 배우들이 잘해 놓은 걸 제가 다 망쳐 놓은 느낌이에요. 예전에 잘될 때도 자책했어요. 습관성 자책이죠(웃음). 이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해요.”
그러면서 어느 작품 때 자신이 가장 무기력해 보였느냐고 되물었다. “‘서부전선’ 때 힘이 없어 보이고, 말도 잘 못하더라”고 답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항상 치열하게 살고 싶어요. 기대했는데 안 돼서 힘든 게 아니라 제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껴져서 힘들어요. 그래서 종종 이창동 감독님, 강우석 감독님이 그리워요. 그때도 힘들었지만 치열하게 살았거든요.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짜증이 나요. 돌아갈 수 없어서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박하사탕’의 명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가 떠올랐다. 그에게 “가장 힘이 되는 요소가 뭐냐”고 물었다.
“다음 작품이에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새 작품으로 씻어내려 해요. ‘불한당’을 찍으면서도 예전에 치열했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냈어요. 물론 다른 배우들은 흔히 하는 거지만 저는 안 해 봐서 새롭게 느껴져요. 칙칙하던 제가 날렵하게 보이니까 반응이 뜨겁네요. 하하.”
한양대 연극영화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3년 연극무대에 서며 데뷔한 그는 1996년 영화 ‘꽃잎’으로 스크린에 첫발을 내디뎠다. 20여 년 동안 배우로 살아온 그는 추락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토로했다.
“잘 내려오고 싶어요.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그 배우 지금 뭐하지’라는 소리는 정말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불한당’이 제겐 매우 중요한 작품이에요. 이 영화를 하며 추락하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칸에 와서 많은 생각을 했다는 그는 “내가 연기할 캐릭터의 얼굴이 궁금해졌다”는 말을 던졌다. “항상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니냐”고 되묻자, “전에는 굵직하게 캐릭터를 잡았는데 이젠 디테일이 신경 쓰인다”고 설명했다.
“칸에 오기 전에 이창동 감독님을 만나 길을 걸으며 ‘요즘 주·조연을 떠나 캐릭터 얼굴이 궁금해지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만들어 가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감독님께서 재밌다고 하시더라고요. 시나리오를 보며 내가 표현할 얼굴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게 기대돼요. 이건 영업비밀인데… 거울을 보며 눈썹 반을 밀어보기도 하고, 이빨 몇 개를 뽑은 모습도 상상해 봐요. 어떤 캐릭터든 제게 다가오면 겁 없이, 두려움 없이 달려들고 싶어요.”
그에게 “중견 배우로서의 책임감은 없냐”고 묻자 바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창피하지 않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해요. 남을 신경 쓰며 드는 책임감은 의미가 없죠. 후배들에게 존경받으려고 일부러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지는 못해요. 배우가 그렇게 존경받아서 뭐하겠어요. 내가 잘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짜증을 내며 못 한다고 했을 그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지치지 말아라(이 말을 하며 왼손 주먹을 쥐어 올렸다). 살다 보면 지치고, 무기력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치지 말아라.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박하사탕’에서 실컷 고문한 후 ‘삶은 아름답죠’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즘 그 말이 생각나요. 제 팬들이 많이 떠나갔지만 아직 저를 찾아주시는 팬들이 몇 분은 남아 있거든요(웃음). 얼마 전에 무대 인사를 도는데 한 분이 편지를 주더라고요. 집에 와서 차근차근 읽어 보니 대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힘들어하며 ‘삶은 아름답죠’라는 대사를 되뇌었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취직해 잘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도 그 편지를 읽고 반복해서 그 대사를 해봤어요. 삶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거잖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니 마음이 후련하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엔 어색… 연기맛 달라진 걸 느껴”… 류승완 감독 “젊어지고 강렬해진 듯” 문자
■ ‘불한당’서 中年의 섹시미 발산
지난 17일 개봉한 ‘불한당’은 마약조직 1인자를 꿈꾸는 재호(설경구)와 잠입경찰 현수(임시완)가 교도소에서 만나 뜨거운 우정을 나누다가 서로의 비밀을 안 후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그렸다. 피비린내 나는 범죄물이지만 개성 강한 설경구와 풋풋한 임시완의 연기 합으로 애틋한 드라마를 완성했다.
특히 설경구는 재호 캐릭터에 중년의 섹시미를 덧씌워 여성팬들을 설레게 한다. 이에 대해 그는 “감독이 그동안 내게서 못 봤던 면들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며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완성본을 보니 나도 나이가 들며 연기 맛이 달라진다는 걸 느꼈다. 지금은 이렇게 만들어준 감독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촬영 초반에는 많이 예민했지만 기대감도 컸다. 콘티가 너무 완벽해서 ‘이걸 어떻게 찍으려 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하지만 일부러 비장하게 안 하고 설렁설렁 연기했다. 힘을 빼고 일상의 모습을 보이려 했다”고 덧붙였다.
설경구는 또 류승완 감독과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평한 내용도 전했다. 그는 “류승완 감독이 영화를 보고 ‘젊어지고 강렬해진 듯’이라고 한 줄 평 같은 문자를 보내와 고마웠다”며 “박찬욱 감독도 재밌다고 해 기분이 좋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재호의 대사로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라’와 ‘이렇게 살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이렇게 산다’를 꼽았다. 그는 “사람을 믿으며 살았는데 이 대사를 하면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오는 11월쯤 ‘불한당’보다 먼저 찍은 ‘살인자의 기억법’이 개봉할 예정이다. 설경구는 이 영화에서 딸을 지키기 위해 지워져 가는 기억을 붙잡으며 마지막 살인 계획을 세우는 아버지를 연기했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냈다. 그는 “많이 힘들었을 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촬영한 영화라 애착이 간다. ‘불한당’과 순서가 바뀌어 개봉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며 “두 작품을 하며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너무 높이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글·사진 = 김구철 기자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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