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파·척족 기존 평가 넘어
긍정적 면모 끌어내려 시도
“기존에 친청사대파(親淸事大派) 또는 민씨척족(閔氏戚族)으로만 알려진 민영익(1860∼1914)의 모습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는 19세기 말 열강의 침략 속에서 정세를 잘 판단한 정치가이자 타고난 미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긍정적 면모를 끌어내고 싶었다.”
소설가 김원우(70·오른쪽 사진)가 신작 장편소설 ‘운미 회상록’(2권·글항아리)을 펴냈다. 근세조선의 사상가 민영익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1인칭 회상의 형식을 빌려 재조명했다. 운미는 민영익의 호(號)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후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외교사절단)로 파견돼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일찌감치 개혁과 개방에 눈을 떴다. 그러나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와 갈등을 빚으면서 갑신정변(1884년) 때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은둔 생활을 했다.
민영익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평가가 더 많다. 그의 사대주의 경향과 친청정책이 조선의 갈등과 위기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김 작가는 민영익을 “특이하고 흥미로운 인물”로 바라봤다.
“역사학계에서는 민영익을 정치인으로서, 명성황후의 하수인쯤으로 여기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벼슬에 오르기를 꺼렸다. 그는 국내 처음으로 세계 일주를 한 지식인이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옷보’(패션 마니아)이자 난화(蘭畵)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돼야 한다.”
김 작가가 민영익의 일생에 주목한 것은 1988년부터 6년간 한 일간지에 고영근의 삶을 그린 ‘우국의 바다’를 연재하면서부터다. 고영근은 민영익 자택의 청지기(위탁관리인)에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적극 가담한 우범선을 쫓아 일본으로 건너가 암살했다.
“고영근의 이야기를 쓰면서 민영익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그때부터 꼭 다뤄보겠다고 생각한 게 이제야 열매를 맺은 것이다.”
작품을 향한 김 작가의 집념은 형식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977년 등단 이후 지난 40년간 벼려온 우리말의 조탁(彫琢)이 이번에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그동안 도슬러온(마음을 다잡은) 심지가 그처럼 순식간에 봄눈 녹듯 스러지는 낭패를 빤히 어르면서 나는, 아직 덜 여물었다는 게지…(중략)…앞으로도 서너 해는 더 살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하고는 무르춤히(놀라 멈춰서듯이) 주저앉았다.”(제1장 ‘자기 변명’ 중에서)
사라져 가는 우리말과 방언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그야말로 ‘우리말의 잔칫상’이다. 하지만 낯선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을 참조해야 하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
“요즘 문학엔 말맛이 없는 것 같다. 너무 상투적이다. 2015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약 15개월 동안 작업실에서 하루에 원고지 10장씩 사전을 찾아가며 했다. 물론 어려운 단어 때문에 독자들과는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있지만 우리말이 사장돼서는 안 된다는 마음만은 변함없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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