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 논설위원

“서예는 단순히 검은 선(線)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획의 길고 짧은 것, 굵고 가는 것, 억세고 약한 것 등에도 모두 의미가 있다. 검은 먹도 한 가지 색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밝은 검정부터 어두운 검정까지 사이의 미세한 차이가 무한에 가깝다. 흑(黑)은 백(白)을 만났을 때 가장 화려하다. 하얀 종이와 검은 먹의 대비에 붉은 낙관만 더함으로써 화려하면서 격조 있는 표현에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를 완전히 제거한 절제의 미학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이면서 서예 세계화의 선구자로 알려진 소헌(紹軒) 정도준(69)이 평소에 강조하는 말이다. 최근에는 이런 말도 더러 한다. “판소리 명창이 득음(得音)의 경지에 오르는 것처럼, 서예가가 득선(得線)하기 위해선 장구한 세월이 필요하다. 나는 선 하나를 얻는 데에 한평생이 걸렸다.”

경남 진주시의 촉석루(矗石樓)와 합천군 해인사의 해인총림(海印叢林) 현판 글씨로 널리 알려진 유당(惟堂) 정현복(1909∼1973)이 부친인 그는 열 살 때부터 먹을 갈며 붓을 잡기 시작했다. 대학 진학 후에는 당대의 명필이었던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예 수업을 하고 전업 작가가 됐으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1982년이었다. 조선 시대 중기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시 ‘조춘(早春)’을 전서체(篆書體)로 쓴 작품이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넘치는 생동감과 문기(文氣)에 창의적 필법까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 이래 경복궁 흥례문과 창덕궁 진선문 현판에서부터 2012년 복원된 숭례문의 10m 길이에 2500자(字)를 담은 상량문에 이르기까지 주요 문화재 글씨뿐 아니라, 한글·한자를 넘나들며 서예면서 추상미술이기도 한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걸작들로도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쳐왔다.

그의 대표작과 최근작 9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정도준-필획과 구조’ 특별전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지난달 12일 개막해 오는 11일까지 이어진다. 다양한 서체를 구사한 ‘붓길, 역사의 길’을 비롯해 ‘태초로부터’ ‘천·지·인’ ‘집- 문자의 우주’ ‘집- 따로 또 같이’ 등 주제별 시리즈 작품 등이 인공지능 시대에 더 무게감이 커질 수도 있는 서예의 근본과 새로운 지평을 함께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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