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일을 가진 여성 중에서 해녀는 카리스마 넘치기로 첫손에 꼽힐 것이다. 테왁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닷속으로 거침없이 잠수하는 해녀의 모습은 그 테왁으로 키워낸 식솔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몸짓만으로 아름답고 용감하다. 예로부터 일하는 여성들의 섬이었던 제주에서 나고 자란 여성 영화감독 고희영이 어린 손녀의 시선에서 해녀였던 할머니와 엄마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글로 써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 작업에 새로운 손길이 동참한다. 머나먼 서쪽 땅끝 나라 스페인에서 온 화가 에바 알머슨이 고희영 작가와 함께 해녀의 삶을 그린 그림책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에바 알머슨이 처음 해녀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중국 상하이(上海)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읽은 잡지에 실린 사진 덕분이었다고 한다. 사진 속 해녀의 매력에 빠져들어 이 여성들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고 2016년 5월에 제주에 와서 해녀가 물질하는 장면을 직접 보게 되었다. 당시 고희영 감독은 우도의 해녀들과 7년의 세월을 어울려 지내며 작업한 ‘물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작을 막 끝마친 뒤였다. 함께 그림책 작업을 해보자는 고희영 감독의 메일을 받은 에바 알머슨은 다큐멘터리 ‘물숨’을 한 장면, 한 장면을 돌려보면서 몇 달이나 작업실에 푹 파묻힌 채 이 그림책을 완성한다.
여러모로 각별한 그림책이다. 스페인 작가의 눈에 비친 제주 여성 3대의 얼굴은 말갛고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 늘 억척스러운 이미지로만 그려졌던 것과 달리 노련하고 정다운 인상이다. 제주 해녀는 이제 어업환경의 변화 속에서 점차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바다가 지긋지긋해서 뭍으로 나왔던 주인공 소녀의 엄마는 왜 쥐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쥐고 있던 복잡하고 팽팽한 끈을 놓고 다시 해녀였던 엄마 곁으로 되돌아온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물질을 배우고, 바다님 말씀 따라 ‘숨만큼 살다 가는 법’을 아는 해녀가 된다. 엄마의 꽃 테왁을 바라보는 주인공 소녀는 어떤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할머니와 엄마가 들려준 ‘숨만큼’의 의미는 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고희영 작가는 이 뜻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서 고향 말인 제주어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해녀들이 쓰는 전문용어는 살리고 주를 달았다. 뒤쫓아 오는 사람도 없는데 달리는 삶에 ‘멈춤’ 신호를 켜주는, 숨 고르기 같은 그림책이다.
김지은 어린이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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