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오디션 약속 안지키고 지창욱·김소현 배우 선발
“목소리 연기는 무시하나”… 무대급감 불만 ‘기폭제’로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한국어 더빙판 때문에 성우들이 뿔났다. 당초 공개 오디션을 통해 두 주인공의 목소리 연기를 맡을 적임자를 찾겠다고 발표했으나 이런 과정을 누락하고 16일 배우 지창욱, 김소현이 캐스팅됐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유명 해외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더빙을 유명 연예인이 맡는 것은 일상적이다. 홍보 마케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을 둘러싸고 성우들이 반발하는 건 ‘너의 이름은’ 수입사인 미디어캐슬이 지난 1월 “한국어 더빙판 오디션은 베테랑 성우는 물론 신인과 성우 지망생 등이 참여하는 대규모로 진행된다”며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오디션 현장을 중계할 계획”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성우 정재헌은 자신의 SNS에 “노이즈 마케팅을 펼치더니 나온 ‘너의 이름은’의 캐스팅은 결국 유명 연예인의 이름으로 홍보하고 티켓을 팔겠다는 연예인 캐스팅”이라고 비판했다. 미디어캐슬 측이 “일정 때문에 공개 오디션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자 또 다른 성우 강수진은 역시 SNS를 통해 “한마디로 X랄한다. 일정에 밀려 오디션 불발?”이라고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한층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번 논란의 근간에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성우들의 안타까운 외침이 자리하고 있다. 성우는 지난해 KBS가 제42기를 공개 채용할 정도로 역사가 긴 전문직군으로 분류된다. 단순히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뛰어난 감정 연기를 펼칠 역량을 갖춰야 한다. 한석규, 김영옥, 장광, 김기현 등 성우 출신 연기파 배우들이 즐비한 이유다.

성우 심규혁이 이번 논란을 두고 “타인의 연기를 따라 움직이는 그림에 감정과 타이밍을 맞추며 동시에 주도적 연기를 해내는 ‘더빙’은 결코 쉬운 분야가 아니다”며 “무대 연기와 카메라 연기가 다를 거란 생각은 하면서 마이크는 왜 쉽게 무시하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린 이유다.

1990년대까지 방송가를 주름잡던 성우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하락세를 보였다. 제작비 부담 때문에 외화에 더빙 없이 자막을 붙여 내보내는 경우가 잦아졌다. ‘전격Z작전’ ‘맥가이버’와 같은 외화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2000년 후반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등 성우들의 주 무대가 사라진 것도 요인이었다. 결국 MBC는 2004년 이후에는 성우 채용을 포기했다. 이후 성우들의 일자리가 점점 더 줄어들었고, 근무 환경도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너의 이름은’은 그동안 누적되던 성우들의 불만과 설움을 폭발시킨 기폭제가 된 셈이다.

이런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한국성우협회 측은 ‘더빙 법제화’를 추진 중이다. 스크린쿼터제처럼 더빙이 필요한 작품에 일정 비율 전문 성우를 기용하자는 취지다.

최재호 한국성우협회 사무총장은 “성우는 단순히 목소리로 연기하는 것을 넘어 올바른 말하기를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언어파괴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교육기관과 손잡고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며 “이런 활동을 꾸준히 해나가며 최소한의 근무 여건을 보장받기 위해 더빙 법제화를 4년 전부터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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