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내기로 마음먹고 40대이던 1980년대에 발표한 시집 ‘문둥북춤’ ‘문둥탈춤’ 등을 꺼내 읽어봤다. 그런데 그 시집이 지금보다 훨씬 젊다는 느낌은 없더라. 그동안 내가 쓰는 시어가 조금 바뀌었을 뿐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건 비슷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당신이 낸 시집 중 이번이 가장 좋다는 칭찬이 싫지는 않다.”
김초혜(74·사진) 시인이 새 시집 ‘멀고 먼 길’(서정시학)을 펴냈다. 2008년 시집 ‘사람이 그리워서’ 이후 9년 만의 작품이다. 그는 “그동안 틈틈이 써온 100여 편 중 70편을 골랐다. 최동호 한국시인협회장이 3년 전부터 출간하라고 권유한 것을 이번에야 이뤘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주요 여성 시인 중의 한 명이자, 베스트셀러 소설가 조정래 작가의 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5년 발표한 ‘사랑굿’ 연시로 큰 사랑을 받았고, 남편을 위해 원고 청탁 전화를 응대하며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면서도 시심을 놓지 않았다. 2014년엔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글인 ‘행복이’를 통해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 때문에 이번 시집에선 인생을 바라보는 시인의 더욱 깊어진 성찰을 느낄 수 있다. 표제작이 대표적이다.
“오 하느님/나이는 먹었어도/늙은 아이에 불과합니다/햇살은 발끝에 기울었는데/내 몸이나 구하고/굽은 마음 어쩌지 못해/얼굴을 숨기기도 합니다/몸 안에 가득 들여놓은 꽃은/붉은 조화 나부랭이였습니다/어찌/고요를 보았다 하겠습니까”(‘멀고 먼 길’ 전문)
겸허한 삶의 태도는 물론 욕심과 집착에 대한 깨달음이 배어 있다. 김 시인은 “맨 마지막 행의 ‘고요’는 동물적 욕망, 인간적 욕심을 내려놓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시집 ‘고요에 기대어’부터 썼는데 내가 아직도 관념에만 머문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앞 페이지 사진에 적어 넣은 ‘벌레가 된 그대’는 헛되이 인생을 낭비하는 인간의 삶을 은유한 것이다.
“부탄 벌레는 무엇이든/등에 진다/더는 얹을 수 없는 것도 모른 체/허공도 등에 진다/지고 또 지고/마침내/잠이 되어/짐 속에 갇힌다”
‘과식’ ‘삶’ 등에서도 관조적 자세가 보인다. 팔순을 바라보는 시인은 ‘나이가 들수록 덧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라’고 조언한다.
난해한 나머지 독자와 멀어져 버린 현대시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자기도 뜻을 모르고/남은 더 모르게 쓴다//시가 울고 있다”(‘현대시’ 전문)
김 시인은 “시란 설명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읽는 사람의 것이 되도록 상상의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며 “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감동까지 준다면 말할 나위가 없다”고 강조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먼저 손을 내밀면/웃음이 떠날 날이 없고/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면/아버지와 아들 사이/엄숙함이 떠날 날이 없다”(‘부자유친하고’ 전문)
할머니로서 손자 재면과 재서를 향한 글은 사랑과 정성이 흘러넘친다.
김 시인은 “이제는 큰손자가 고2, 작은손자가 중2가 됐는데 예전처럼 자주 보지 못해 아쉽지만 할머니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며 웃었다.
김진희(이화여대 교수) 문학평론가는 “인간 삶의 가치와 본질을 적극적으로 묻고 탐구해온 것과 맞닿아 있다.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과 노년의 삶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며 “‘길’과 ‘꽃’이라는 인간과 자연의 상징으로 확장·인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