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가계를 돕겠다며 대통령 선거 당시 공약으로 내걸렸던 통신비 인하가 최근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교통정리로 일단락됐다. 당초 예고했던 기본료 폐지는 장기 과제로 돌리고 선택약정 할인율 상향 조정과 보편적 데이터 요금제 신설, 공공 와이파이 확대 등 소비자 혜택 다양화로 결론 났다.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공약 후퇴라며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지만, 오히려 통신업계의 현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시장 협치(協治)’로 긍정적 평가를 하고 싶다. 물론 국회의 입법 보완에 앞서 행정부 단독의 고시와 시행령 개정으로 서둘러 일부 조치를 선(先) 시행하는 모양새도 시장 자율질서를 해칠 우려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이 정도 합리와 중용의 지혜를 발휘한 것만도 어딘가 싶다.
사실 통신비 인하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반복해 나왔던 단골 공약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김대중 정권 초 기본료 인하부터 최근 박근혜 정권의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까지 서슬 퍼런 겁박으로 출발해 사후 대폭 축소되는 과정을 되풀이하곤 했다. 공약팀 내 제도권 밖 전문가들이 전 정권의 이른바 ‘정경유착 적폐’를 이상적 개혁정책으로 교체하겠다는 의지를 새 대통령의 선언으로 공식화한 다음, 정작 집권 후 실무적인 검토를 거치면 이 중 상당수가 시장에서 적용 가능한 액션플랜으로는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공약 수정작업은 특정 이념편향 집단이 말하는 친시장도, 반시장도 아닌, 합(合)시장의 상식이라 할 것이다. ‘정치는 생물’이란 정치 9단의 말처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또한 살아 있는 시스템이다. 그 도도한 흐름에 역류하려는 시도는 자본의 편에서든, 노동의 편에서든, 심지어 심판 격인 공공의 편에서든 실패하기 마련이다.
통신비 인하뿐 아니다. 원전 폐쇄를 둘러싼 새 정부의 에너지 정책 추진 방향도 현실감각을 되찾아 선회할 것을 요청한다. 신재생에너지는 인공지능(AI)처럼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은 선도기술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100% AI 시대가 오겠지만, 그동안 우리는 옛 기술과 동거해야 한다. 태양과 바람, 파도에 의존하는 새 에너지가 완벽하다면 세계 최강국 미국은 굳이 ‘더러운’ 화석연료 셰일가스를 땅속에서 소환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자력발전은 화력발전처럼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기후변화의 주범도 아니다. 적절한 방사능 통제기술만 있으면 천년만년 꺼지지 않는 마법의 불이다. ‘원전=원폭’처럼 막연한 공포는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사고 위험을 원천 차단하고, 규모를 소형화한 차세대 모듈형 원자로도 곧 선을 보일 예정이다. 에너지 정권교체의 과도기에 구 에너지와 신 에너지를 적절하게 배합해 쓰는 에너지 협치도 주문하고 싶다. 실손보험료, 최저임금 등 나머지 경제 이슈 또한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권은 출범 전 소통을 강화한 협치를 말했다. 인사에서도 반대진영 인물까지 포용하는 탕평을 실천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당·정·청에 포진시킨 면면은 역대 ‘내 사람 인사’를 능가하면 했지, 덜하진 않다. 국회에서도 야당과 협력하는 모습은 아직 충분히 국민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경제 정책에서라도 시장과 협치해 달라. 시장은 대한민국 정부가 맞서 싸워야 할 적이 아니다. nosr@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