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

20년 전인 1997년 7월 동아시아는 태국 밧(baht)화의 폭락을 시작으로 외환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오늘날 동아시아의 모습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엄청난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쌓았다. 위기를 겪고 얻은 뼈아픈 교훈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6월 말 외환보유액은 3805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다. 또한, 우리는 해외 금융자산이 부채보다 많은 순채권국이 됐다. 그런데 왜 외환보유액을 더 늘리자고 하는가.

한 나라의 적정 외환보유액은 대개 그 나라의 수입 규모, 만기 1년 미만의 유동부채액, 외국인의 국내 주식과 채권 등에 대한 포트폴리오 투자액, 통화량(M2) 등을 적절히 조합해서 산정한다. 흔히 사용되는 국제결제은행(BIS)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의 기준을 적용해 보면, 2016년 말 우리나라의 적정 외환보유액은 3000억∼4500억 달러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이웃의 중국은 약 3조 달러, 일본은 1조2500억 달러, 대만은 4000억 달러 이상 보유하고 있다.

물론, 외환보유액을 많이 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국은행이 외환을 확보하려면 통화안정증권(통안채)을 발행해 자금을 확보하는데, 이때 이자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 한은은 외환보유액을 미국의 재무증권(TB) 등으로 보유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자 수익을 얻는다. 따라서 외환보유에 따른 비용은 주로 미국과 우리나라의 국채 금리 차이에서 발생한다. 한은이 발권력을 이용해서 외환을 구입할 수 있겠지만, 이때는 물가 상승의 위험이 따른다. 또한, 외환보유액이 늘면 우리나라 원화의 평가절상 압력이 생기고, 미국으로부터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될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외환보유액을 더 확충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서 비롯된 한반도 위기 상황은 언제든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을 수 있다. 지난 4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가 한 예다. 북한이 추가로 6차 핵실험마저 강행하면 한반도는 정말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국가위험도가 크게 치솟고 외국자본의 이탈이 가속화할 수 있다. 5000억 달러 이상의 대규모 외환보유액은 이러한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비하는 한국 경제의 보험이 될 수 있다.

둘째, 국제경제적 리스크의 증대다. 미국의 금리 인상을 비롯해 선진국들의 통화정책 기조가 ‘양적완화’(QE)에서 ‘양적긴축’(QT)으로 바뀌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국내적으로 금리 인상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는 곧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자본의 이탈 가능성 증대를 의미한다. 또한,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이후 잠복해 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통상 마찰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미·중 통상 마찰과 중국 경제의 경착륙은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셋째, 경제정책의 자율성 확보 차원이다. 넉넉한 외환보유액은 국내 경제정책 선택의 폭을 넓혀줄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소득 증대를 통한 포용적 경제성장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책은 외환보유액이 충분할 때 펼치기가 훨씬 쉽다. 지난 10년간 더 많은 외환보유액을 쌓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외환보유액을 적극 확충해야 한다.

우선,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 확충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고, 가급적 짧은 기간 안에 그 규모를 5000억 달러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 그리고 미국에 연방준비제도와 한은 사이의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을 제안하면서 우리나라가 외환보유액을 더 많이 확충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해야 한다. 20년 전 우리나라는 ‘IMF 위기’의 고통과 치욕을 겪었다. 최근에도 일본이 부산 위안부 소녀상을 핑계로 한·일 통화스와프 협정 연장을 거부했고, 중국은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한·중 통화스와프 협정 연장에 대해 명백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외환보유액이 충분하지 않은 나라가 겪는 수모다.

국제금융 관계야말로 자력구제의 원칙이 횡행하는 무정부 상태에 가깝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생존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로 대접받으려면 더 많은 외환보유액 확충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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