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황홀경이다. 성자와 위대한 시인의 조건, 위대한 사랑의 조건이 위대한 용기를 지닌 사람에게도 허락된다.”
“현현(顯現)과 비슷하다. 죽음이 가까이 있었지만, 전에는 그토록 완전하게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없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였다.”
마치 종교적 ‘깨달음’이나 ‘계시’의 상태로 읽힌다. 이는 1900년대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이 마주쳤던 ‘내적’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피에르 백작은 진리를 찾아 수많은 철학자와 현자를 만났지만, 결국 거의 평생을 군에 바친 늙은 사병 플라톤 카라타예프의 모습에서 ‘영원한 진리의 화신’을 발견한다. 영국 시인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귀향’은 “어디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평범한 아이로 떠났고, 생각하는 남자로 도착했다”고 보어 전쟁에서 귀환하는 영국 군인들의 변화를 묘사한다.
사람들은 전쟁의 ‘극한 경험’에서 자신과 세상에 대해 무언가 심오한 것을 깨닫는가? 다른 사람에게 없는 권위를 획득하는가? 유발 하라리의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비추어 이전 세기의 다양한 전쟁 회고록을 분석하고 있다. 베스트셀러인 ‘사피엔스’(2014년)와 ‘호모 데우스’(2016년)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거시사적인 질문에 집중했다면, 저자가 유명해지기 전인 2008년에 나온 이 책은 그가 전공했던 ‘중세 전쟁사’의 전문성을 살린 전쟁 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전쟁에서 ‘계시’만 있는 것은 아니고 환멸의 깨달음도 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프랑스인 장 노통 크뤼는 “용기와 애국심, 희생, 죽음과 관련해 우리는 지금까지 내내 기만당했다. 첫 총성이 울리는 순간 우리는 참전용사에 관한 소문과 일화, 역사, 문학, 예술, 대중 연설 등이 모두 거짓임을 깨달았다”고 기록했다. 또 20세기 후반에 오면 전쟁 참가자의 ‘트라우마’가 부각된다. 한편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그 경험이 어렵고 위험할수록, 그들의 말에 알 수 없는 ‘권위’가 생긴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위협을 가장 가까이서 치열하게 경험한 탓일 것이다.
책의 영어판에는 ‘전쟁 계시와 현대 전쟁 문화의 형성’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계시’는 종교와 근본적인 연관성은 없고 단지 지식을 얻는 방법을 의미한다. 전쟁의 경험은 분명 참전자를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키고, 성격을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이전의 전쟁 회고록에는 전쟁을 계시 경험으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세에는 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모든 권위와 의미의 원천이었다. 전쟁의 패배는 신의 노여움을 증명하는 증거였고, 살아남았다면 신의 은총이었다. 전쟁은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였고, 전투원들은 전쟁에서 새로운 지식을 깨닫는 계시를 얻을 수 없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를 지나 지혜와 권위의 기준이 신과 이성에서 인간과 감정으로 옮아온 인문주의 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계시적 전쟁 해석이 등장한다. 저자는 이를 ‘지식=성경×논리’에서 ‘지식=경험×감수성’이란 공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도식화한다. 특히 낭만주의의 ‘숭고함(the sublime)’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여기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 바로 전쟁 경험이었다. 20세기가 되자 철학의 무게중심이 이성과 정신에서 감정과 육체로 옮아갔고, 전쟁은 정신에 대한 육체의 승리를 보여주는 주요 사례가 됐다.
이 같은 전쟁 문화사는 왜 필요할까. 서양 사회가 전쟁의 긍정적 이미지를 제거해 왔지만, 여전히 서양 문화는 전쟁과 진실의 연관성에 대한 긍정적 가치를 깊은 곳에서 주입해 왔다. 근대 후기 전쟁의 거대서사는 인간이 나약해서 감히 진리와 대면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전쟁이 영원한 진리를 드러낸다는 식이다. 전쟁이 영원한 진리이고, 평화는 일시적 환상을 키운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전쟁을 다룬 수많은 소설과 영화를 떠올리면 된다. 저자는 “근대 시대의 다양한 전쟁 경험담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이런 전쟁 경험담과 거리를 유지하고, 오늘날의 전쟁 문화를 헤쳐나갈 길을 조금이나마 쉽게 찾도록 돕는 것”이라고 이 책의 취지에 대해 설명한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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