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지난 17일 북한에 군사회담·적십자회담을 동시에 제안한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 외교를 총괄하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면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날인 18일에는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면담했다. 주요 의제는 최근 발표한 신규 대(對)이란 제재였지만, 문재인 정부의 대북 대화 제안도 안건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악관·국무부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 대화 제안과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한국 정부에 물어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도 트럼프 행정부의 조율된 입장이었던 셈이다. 특히, 틸러슨 장관과 맥매스터 안보보좌관이 한국의 ‘깜짝’ 대북 대화 제안에 격노했다는 후문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까칠한’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남북대화 제안의 시기 문제다. 지난 6월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망 이후 미국 분위기가 북한에 매우 부정적인 상황에서 한국이 서둘러 대북 대화를 제안한 것에 미국은 상당히 언짢아하고 있다. 동맹의 분노를 공유·배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것이다. 여기에 북한이 지난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발사를 강행하면서 6월 말 한·미 정상회담 당시와 상황이 많이 바뀌었는데도 문재인 정부가 기존 구상을 그대로 밀어붙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나쁜 행동’을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보상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또 다른 이유는 한·미 간 미흡했던 사전 협의였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과 사전 조율이 끝났다”고 했지만, 미국 측에서는 ‘사실상 통보를 받았다’는 입장이라는 이야기가 워싱턴에서 돌고 있다. 한국이 미·중 정상회담이나 북·미 대화 전후에 미국에 사전 조율을 요구하고, 사후에는 가장 빠른 설명을 요구했던 과거를 감안하면 미국 입장에서는 자존심에 상처가 날 만하다. 최근 워싱턴의 세미나에서 만난 한 전문가는 “문재인 정부가 미국이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진단까지 내렸다.
오는 27일이면 한·미 동맹의 출발점인 6·25 전쟁 휴전협정이 체결 64주년을 맞는데, 한·미 관계는 ‘간’을 보는 상황으로까지 전락한 셈이다. 과거 한국에서 진보 정당, 미국에서 보수 정당이 집권하면 늘 엇박자가 났던 실수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한·미 양국 모두에서 팽배해지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에 북핵 문제는 너무 엄중하고, 한·미 동맹은 우리 안보에 너무 중요하다.
5년 단임 임기의 문재인 정부가 빨리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조급증에 빠지면 한·미 동맹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베를린 구상’이라는 대사(大事)까지 망칠 수 있다. 그리고 ‘진실의 순간’은 곧 열린다. 북한이 남북회담에서 비핵화 의지가 없다고 천명하거나, 또다시 핵·미사일 도발에 나설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플랜 B’를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때도 문재인 정부가 대북 대화 제의만 되풀이한다면, 한·미 동맹과 한반도 안보는 바로 그때 가장 큰 위기에 처할 것이다. 미국의 협조가 없다면, 한·미·일 공조가 없다면 북핵 문제를 풀 수 없다는 현실부터 문재인 정부는 인정해야 한다.
boyoung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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