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연대기 / 로버트 어빈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옮김 / 책세상

‘좀비(Zombie)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로메로 감독이 지난 16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로메로 감독은 이른바 ‘시체 3부작’으로 유명한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1969), ‘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1979), ‘시체들의 낮(Day of The Dead)’(1985)을 만든 세계적 연출자다. 요즘 영화·게임·패션 등 문화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좀비 스타일의 원형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지 클루니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출연했던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2004), 브래드 피트가 주연하고 제작한 ‘월드워Z’(2013), 그리고 한국형 좀비 영화인 ‘부산행’(2016)까지 로메로 감독 이후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는 흥행불패였다.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면서 인육을 탐하고, 한번 물면 인간도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좀비의 특징은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상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콘텐츠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로메로 감독보다 앞선 좀비가 있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쓰여 그 이후 좀비 소설과 영화에 영감을 준 ‘원형’ 또는 ‘클래식’ 같은 단편들이다. 책은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작가의 단편 12편을 모은 것이다.

영어권에 좀비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알린 작품은 윌리엄 B 시브룩의 ‘마법의 섬’(1929)이다. ‘마법의 섬’에 수록된 단편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과 ‘투셀의 창백한 신부’는 좀비 관련 선집이나 역사를 말할 때 빈번하게 인용된다. 흑인 추장 부부가 농장 일을 시키기 위해 무덤에서 불러낸 좀비 무리가 등장한다. 몽유병 환자처럼 멍한 눈빛을 한 채 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좀비들은 우연히 소금 맛을 본 후 자기 존재를 깨닫고 무덤으로 되돌아간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 속의 좀비. 시체처럼 끔찍한 모습을 한 채 사람을 공격하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적어도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좀비는 주술사에게 조종당하며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나약한 존재였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 속의 좀비. 시체처럼 끔찍한 모습을 한 채 사람을 공격하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적어도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좀비는 주술사에게 조종당하며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나약한 존재였다.

시브룩은 미국의 탐험가이자 저널리스트였다. 1927년 아이티를 방문했다가 현지 종교인 부두교에 관심을 두게 됐고, 이를 토대로 ‘마법의 섬’을 썼다. 북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있는 아이티는 15∼16세기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개척한 나라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거쳐 1804년 독립했다. 20세기 초 유럽과 북미 사람들은 부두교의 주술적 힘에 매료돼 있었다. 부두교의 사제나 주술사가 사람을 죽음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 매장했다가 시체를 파내어 부활시킨다는 소문에 주목했다.

호러와 판타지의 거장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지옥에서 온 비둘기’(1934)는 스티븐 킹으로부터 “미국 최고의 호러 단편 중 하나”로 극찬받은 작품이다. 여행 중이던 그리스웰은 숲 속 외딴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대상에게 친구를 잃는다. 공포에 빠진 그는 그 마을의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함께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다. 그 진실의 끝에는 현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 태생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라프카디오 헌의 ‘귀환자들의 마을’(1889)은 시브룩보다 40년이나 앞선 좀비 소설이다. 그러나 시브룩의 좀비와는 다르다. 헌의 좀비는 유령에 가깝다.

책에 등장하는 좀비는 로메로 감독의 좀비, 또는 현대의 무시무시한 좀비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초창기 좀비들은 대부분 독자적인 의식 없이 주술사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 캐릭터다. 시체 같은 겉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지만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노예처럼 일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외롭고 나약한 존재다.

현대 좀비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원형의 좀비들이 낯설고 시시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전해지는 예상하지 못한 공포와 인간의 이중성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평론가들은 인육을 먹는 좀비를 두고 체제순응, 인종차별, 군국주의 등 사회적 문제를 은유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메로 감독의 표현이 더욱 흥미진진해 보인다. “좀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380쪽, 1만4000원.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김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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