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는 관객이다. 판소리의 3대 요소 중 하나도 청중이다. 연극이나 판소리뿐만 아니라 공연예술 전반에 걸쳐 없으면 안 되는 가장 소중한 부분이 바로 현장을 지켜보는 관객의 귀와 눈이다.
예부터 우리 전통연희를 구성하는 판에는 관객의 추임새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추임새의 정의는 판소리 공연 중에 고수나 청중이 소리판의 흥을 돋우기 위해 곁들이는 감탄사를 지칭하는 용어다.
추임새라는 말은 ‘위로 끌어 올리다’ 또는 ‘실제보다 높여 칭찬하다’라는 뜻의 ‘추어주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얼씨구” “좋다” “잘한다” “허이” “그렇지” “아먼” 등이 있다. 추임새의 사전적인 설명인데 사실 추임새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공연예술에서 자리 잡은 우리 관객들의 자랑스러운 응원 문화다.
우리의 추임새는 공연자들만이 공연을 만들어나가는 ‘닫힌 구조’의 공연예술이 아니라, 공연자와 관객이 함께 공연을 만들어 나가는 ‘열린 구조’ 즉 직접적인 참여 행동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공연예술을 지향하고 있다.
상대방을 칭찬하고 흥을 북돋는 추임새는 박수만 보내는 서양의 관객 문화보다 훨씬 더 주도적이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런 전통을 지녀온 우리나라 관객들의 추임새 저력은 어린아이부터 어르신, 나아가 온 국민과 함께 “대∼한. 민. 국”을 목 놓아 외치며 2002년 월드컵을 뒤흔들었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축구 4강의 신화를 쓰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으며, 세계인들에게 응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요즘 관객들의 추임새는 수십 단계 수위를 높인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천만 관객의 숫자가 심심찮게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며 영화계를 응원하고 있고 수백만의 국제적인 팬들을 지닌 한류 주인공을 탄생시켰으며 어마어마한 숫자의 관객들이 아이돌 스타들을 양산하며 공연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문화예술계는 늘 열악하다. 특히, 대중적이지 않은 순수예술 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국민의 세금으로 문화예술을 지원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생색내는 높은 양반들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예술계를 지켜보는 고마운 관객들의 행보는 비록 적은 수이나 백만 대군의 힘을 실어 주기도 한다. 날카로운 비판으로 공연의 질을 높이는 평론가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양보다 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순수예술의 후원자가 되기도 한다.
잊지 못할 사건이 생각난다. 새 극장이 지어지고 축하 공연으로 연극 한 편이 올려졌다. 극장을 지어준 높은 분이 공연을 보러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관계자들이 조심스럽게 응대하며 끝까지 볼 계획이 아니고 잠깐 인사로 오셨다면 뒷자리로 좌석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굳이 좋은 자리를 요구했고, 수십 명이 객석 앞자리 중앙에 앉아 잠시 공연을 보다가 우르르 나갔다. 배우들이 마음을 다해 연기하는 도중에 관객을 헤치며 뚜벅뚜벅 나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말로는 예술을 사랑한다며 극장까지 지어준 양반이 공연 도중에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모습이나, 그 양반에게 얼굴도장 찍으려고 온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만류도 하지 않고 무더기로 같이 빠져나가며 공연을 망치는 행위나, 바쁘신 분들이 조금이나마 공연을 봤으니 고맙게 알라는 어처구니없는 해명을 하는 관계자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배우들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망연자실하며 터질 것 같은 분통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날 공연장에 있던 관객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용감한 관객들의 끝없고 질긴 투쟁으로 결국 관계자와 높은 분들의 사과까지 받아낸 일은 정말 고맙기도 했지만, 두고두고 우리 연극인들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문화예술은 한 나라의 꽃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꽃을 키우고 즐겨야지 거름 주고 물주며 생색내는 것은 그 꽃을 꺾는 어리석은 행위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밝히고 신문고를 울리는 관객들이 있어 살맛 난다. 문화예술의 지킴이며 가장 순수한 후원자인 관객에게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는 것이 부끄러움을 대신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공연예술인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 너무 덥다. 그러나 나는 조정래 선생의 밀리언셀러 소설 ‘아리랑’을 소재로 만든 ‘뮤지컬 아리랑’에 출연하며 이 열탕 같은 더위를 피해 시원한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뮤지컬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감골댁이라는 강인한 엄마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파란의 시대를 살아냈던 민초들의 삶과 사랑의 이야기다. 투쟁의 아픈 역사 속에 슬퍼도 불렀고 좋아도 불렀던 우리 모두의 노래 ‘아리랑’ 이야기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조선이라고 부르짖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나는 한국이다’를 뼛속 깊이 아로새기기를 원하는 작가의 염원이 담겨 있는 뮤지컬이다. 그 현장의 다양한 관객들이 추임새를 보낸다.
‘아리랑’ 관람을 온 초등학생 영재들의 진지한 추임새는 배우들을 울컥하게 했고, 자녀들에게 아픈 역사를 보여주며 미래를 이야기하는 부모들의 추임새는 배우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힘없는 민족의 절절한 투쟁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젊은이들의 추임새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지만 이런 관객들의 추임새를 먹고 사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내가 참 자랑스럽다.
이제 며칠 후면 광복절이다. 소중한 관객들과 함께 부를 ‘뮤지컬 아리랑’이 벌써부터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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