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영화 ‘군함도’는 지옥 섬에서 한인 강제 징용자들을 탈출시킨 광복군 소속 OSS요원 박무영(송중기 분)이 나가사키(長崎) 원폭투하 장면을 멀리서 응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류승완 감독은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의 거대 버섯구름을 바라보는 박무영과 한인 징용자들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통쾌함, 그리고 근심으로 바뀌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했다. ‘군함도’는 애국심을 부추기는 이른바 ‘국뽕’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복잡 미묘하게 얽힌 한·일 군상을 냉정하게 담아냄으로써 관객들을 그 역사의 현장과 마주서게 하는 영화다.

이후 72년의 세월이 흐르며 나가사키는 반핵의 상징 도시로 탈바꿈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 9일 나가사키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 평화 기원식’에서 “유일의 피폭국으로서 ‘핵 없는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일본의 책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의 발언엔 원폭 피해국이라는 점만 부각됐을 뿐 전범국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빠져 있다.

‘군함도’의 엔딩 크레디트에도 나타나 있지만, 일본은 2년 전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면서 약속한 강제동원 정보센터 설립이나 안내판 설치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 협상 당시 우리 정부는 한인 강제동원 역사를 명시하지 않은 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했고, 일본 측은 정보센터를 설립해 관련 사실을 알리겠다고 약속해 협상이 겨우 타결됐다. 그러나 말뿐이었고 일본은 지금까지 약속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나가사키시는 한술 더 떠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혹사당한 한인 징용자 3400명 명부를 폐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피폭 도시 이미지를 내세우면서도 한인 피해자의 역사는 지우려는 나가사키시의 이중적인 모습엔 전범국 일본의 이중성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니 ‘군함도’에서 탈출용 사다리를 연결하기 위해 대형 욱일기를 찢는 이강옥(황정민 분)의 행동에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픽션에 불과한 이 장면을 두고 일본 네티즌들은 격분하고 있다지만, 이런 영화도 담담히 역사로 받아들이며 과거를 되돌아봐야 성숙한 국가의 시민이 된다. 그래야 ‘과거를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다짐하는 한국 내 대일 우호파들의 목소리도 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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