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이 46년 만에야 군인으로서 안식을 찾게 돼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23일 오전 경기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군 제7지구 봉안소에서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이 열린 가운데 실미도희생자유가족모임 초대 회장으로 활동한 이명철(59·사진) 예비역 공군 상사는 “오늘은 대전한밭체육관 복싱 선수로 집안의 기둥이었던 맏형(이명구)이 체육관 바로 옆 건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대전분소 요원들에게 포섭돼 실미도 북파공작원으로 갔다가 사망한 지 꼭 46년 되는 날”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추모사에서 “수십 년간 철저히 비밀에 가려진 채 하늘 아래를 떠돌아다닌 원혼들이 이제서야 안식을 찾게 됐다”며 “형을 포함한 실미도 공작원들의 원혼을 풀어주려면 국가가 잘못을 반성하고, 국립묘지나 호국원에 안장되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 ‘실미도’에서 묘사된 것처럼 실미도 공작원들은 전과자도, 사회의 쓰레기도 아닌 아주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며 “ 2년 전 작고한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랫목에 아들 밥을 묻어둔 채 실종된 아들을 기다렸다”고 회고했다. 그는 21년간 군 복무 후 형이 실미도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유족회 일에 헌신해왔다.
이날 군 장례 절차에 따라 치러진 합동봉안식으로 국방부가 발굴한 실미도 공작원 20명의 유해와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4명 중 2명의 위패가 봉안소에 안치됐다. 합동봉안식에는 유족 20명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서울로 침투한 ‘1·21 사태’에 대응해 같은 해 창설됐다. 실미도 부대 공작원은 북한 무장공비 수와 같은 31명이었다. 이 가운데 7명은 훈련 중 숨졌고 24명은 가혹한 훈련과 부당한 대우에 반발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대방동까지 온 이들은 군경과 대치하며 교전을 벌인 끝에 20명이 숨졌다. 교전으로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도 사망했다. 살아남은 실미도 부대 공작원 4명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10일 처형된 뒤 암매장됐다. 교전 중 숨진 공작원 20명의 유해는 벽제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상태로 잊혔으나 2004년 영화 ‘실미도’ 개봉 이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사건 조사와 함께 이들의 유해를 발굴했다. 처형된 실미도 공작원 4명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한 상태다.
정충신 기자 csju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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