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단어에 시제를 매긴다면 아마도 과거다. 기억은 흘러간 경험의 보관창고라는 게 상식이다. 한데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도 있다. ‘미래 기억’이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 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동명의 영화 개봉을 앞둔 김영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 나오는 주인공 독백이다. 치매에 걸린 노년의 연쇄살인범이 기억과 시간, 망상과 싸우는 묘사가 치밀하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미래 기억이란다. ‘식사하고 30분 후 약 복용’처럼 앞으로 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기억 자체가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이란 주장도 있다. 뇌과학자 한나 모니어와 철학자 마르틴 게스만은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는 공저에서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라며 통념의 반전을 꾀한다. 기억은 그저 지난 데이터의 저장소가 아니라 경험의 재처리를 통해 미래를 유용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보면 기억은 다재다능하고 영리한 조수가 될 수 있다.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허사비스 딥마인드 창업자는 ‘미래 기억’을 주제로 논문도 쓴 인지신경과학자다. 알파고는 사람의 과거 기억인 기존 기보를 학습하며 미래 기억으로 나아갔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했다.
미래 기억은 일종의 처세 방법론으로도 힘을 발휘한다. 99%의 사람은 현재를 보면서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반면, 1%의 사람만이 미래를 내다보면서 현재 어떻게 행동할지를 찾는다고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12세에 벌써 친구들 앞에서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을 흉내 냈고, 빌 게이츠는 10대 시절부터 세계의 모든 가정에 컴퓨터가 한 대씩 설치되는 것을 상상했다는 사례도 곧잘 인용된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 모습을 계속 머릿속에 그리면 무의식적인 능력이 발휘된다는 얘기다.
이런 발상법은 집단기억에도 유효하다.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인사에는 미래 비전보다 과거 기억이 두드러진다. 통상임금 논란은 미래를 도모하기에 바쁜 기업의 역량을 과거사에 묶어두고 있다. 개인은 물론, 기업도 나라도 진취적인 미래 기억을 세울 때 활력 넘치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