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와 강적들 / 톰 니콜스 지음, 정혜윤 옮김 / 오르마
톰 니콜스 미국 해군대 교수는 2013년 자신의 개인 블로그 ‘the War Room’에 ‘전문지식의 죽음(The Death of Expertise)’이라는 짧은 글을 올렸다. 조지타운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를 거친 러시아 전문가인 그가 러시아에 대해 가르치려 드는 비 전문가들에게 화가 나 쓴 글이었다. 하루 한나절 인터넷 검색으로 10년은 걸려야 쌓을 수 있을 지식을 습득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온갖 문제에 대해 허풍을 떠는 상황에 대해, 약간의 정보, 그것도 넘치는 가짜 정보를 바탕으로 전문 지식을 가졌다는 착각에 빠져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세태에 대한 글이었다.

전문지식의 위기, 전문가의 죽음을 드러내는 가장 상징적인 말은 ‘나도 너만큼 알아’이다. 엄청난 정보의 바다에서 간단한 검색만으로 어떤 정보라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은 전문가의 충고를 거부한다. 때론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는 것을 멋진 자기실현 활동이나 고급문화 취향의 표식처럼 여긴다.
저자는 이를 ‘나르시시즘’으로 규정했는데, 이런 지적 나르시시즘은 정치, 사회는 물론 전통적으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한 과학이나 의학 분야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의사의 말보다는 백신 접종의 유해성을 말하는 영화배우의 말을 더 신뢰하고 살균처리 하지 않은 우유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과학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무살균 우유가 훨씬 자연 상태에 가까운 풍미와 영양을 제공한다는 인기 요리사의 말에 더 호응한다.
이런 상황을 몰고 온 가장 큰 원인은 당연히 인터넷이다. 하지만 인터넷 탓만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담당해온 부분들이 위기에 빠진 것도 심각한 이유이다. 대학은 학생과 학부모가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 소비 상품으로 전락했고, 미디어는 정보량이 폭증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독자가 알아야 할 정보보다 독자가 원하는 정보, 정보의 질보다 속도를 더 중시하고 있다.

물론 잘못된 판단, 자기 이익을 위해 대중들을 위기로 몰아넣은 전문가에 대한 반감, 엘리트에 대한 반발도 매우 강력한 원인이다. 하지만 저자는 전문가들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정서 밑바닥에는 작은 불평등의 기미만 보여도 참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적 문화가 야기한 분노가 깔려있고 정치 시스템 안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말을 어떤 이슈에 관해서건 개개인의 의견이 동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는 ‘평등주의’가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이제 정보가 넘쳐 나는 시대에 사람들은 더 무지해지고 있다. 정화되지 않은 정보, 때론 틀린 정보가 제대로 된 지식을 밀어낸다. 누구도 시간을 들여 지식을 쌓으려 하지 않고 몇 초 안에 답을 얻으려 한다. 일반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려는 자세를 버리고 지적으로 퇴락하고 있는 반면, 전문가들은 비전문가와의 소통을 거두고, 자신들끼리의 성안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저자는 결국 이런 전문지식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고 진단한다.
이 같은 분석이 저자가 책에 스스로 썼듯이 엘리트주의적인 것도 사실이다. 주변부가 중심을 전복하고,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 기존 시스템이 혁명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전문가와 비전문가라는 기존의 대립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그의 분석이 과연 맞느냐는 질문도 계속하게 된다. 역사 속에서 전문가 집단이 대중에게 안긴 실망감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둘러싼 다양한 상황을 ‘전문지식의 죽음’이라는 프레임으로 분석한 그의 통찰은 예리하기만 하다. 이 프레임으로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많은 것이 새롭게 보인다. 쓰레기 정보에 휘둘리는 시대, 비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의 불통이 우리 모두에게 해가 될 것이라는 지적,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도 비판적 판단력과 지적 고양의 욕망을 잃어버린 대중들이 결국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지적 등은 새로운 고심 거리를 던진다. 우리가 쓸 수 있는 분석 틀이 다양할수록 이해는 깊고 풍부해진다.
다만 이 같은 변화가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대의 대세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분석은 긴 논의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 말이다. 현상의 분석을 통해 그런 논의를 촉구한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매우 유용하다.
책 마지막 장에 저자는 양측에 짧게 조언을 남긴다. 일반인들은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되려면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춰야 하며, 전문가에 대한 적의를 내려놓고 의견을 받아들이라고. 반면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사회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충고가 의심의 여지 없이 옳다고 생각돼도 그것이 다른 이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라고 한다. 420쪽, 1만80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일러스트 이강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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