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그림)는 영조와 정조 시절 풍속화가로, 한국 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가장 인기 있는 민족의 화가라 할 만하다. 씨름, 서당, 우물가 등 조선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해학을 화폭에 담아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원이 활동하던 때, 격조 높은 문화인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여간 속되게 여기지 않았다. 현실 삶을 그린 것을 속된 그림 ‘속화(俗畵)’라고 불렀고, 눈으로 본 대로 외모 그리기를 더욱 무시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전통 회화 내지 수묵화 하면 여전히 실제 묘사보다는 마음 따라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하며 정신세계를 앞세운다.

단원은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대상을 명징하게 그려내는 밝은 눈의 소유자였다. 사의적 관념성 못지않게 대상의 존재감이 화면에 생동하는 리얼리티의 정신성, 곧 신사(神似)를 구현했다. 단원의 회화는 인물초상, 신선도와 불화, 산수, 꽃과 새, 호랑이나 말 같은 덩치 큰 동물부터 미세한 풀벌레 그림까지 거침이 없었다. 묘사기량이 출중하고 우뚝했다. 단원 자신도 다른 화가와 자기 그림 솜씨의 차이에 대해 “한밤중의 물고기 눈깔도 구분해낼 거”라며 자부심이 대단했다. (서유구 ‘임원경제지’)

단원의 데생 능력이 각별했던 것은 당시에 유입된 서양화법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사람의 눈에 든 광경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 입체감과 원근법을 가장 잘 구사한 화가로 손꼽혔다.

특히 금강산 그림이나 옥순봉도, 도담삼봉도 같은 단원의 진경산수 작품을 보면, 단원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풍경화를 그렸나 싶을 정도다. 그 시절 카메라-오브스쿠라(camera-obscura)라는 서양의 광학기구가 들어와 화가들이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김홍도는 20대부터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로 활약했다. 그런데 정조 어진 제작을 위한 초본심사 콘테스트에서 정조는 김홍도를 지목한 중신들의 의견을 내쳤다.

자기 얼굴과 닮게 그린 화가로 한종유나 이명기를 선택해 주관화사로 지정한 것이다. 결국 단원은 부팀장 격인 동참화사로 의상을 그리는 데 그쳤다. 진솔함을 드러내는 사실 묘사력의 뛰어남이 걸림돌로 작용한 게 아닐까.

관련기사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