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격차 / 마이클 마멋 지음, 김승진 옮김 / 동녘

스코틀랜드의 상공업 도시 글래스고에 있는 칼튼과 렌지라는 두 마을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은 28년이나 차이가 났다. 1998∼2002년 칼튼 남성의 기대수명이 54세였는데, 이는 인도의 남성보다 8세나 짧았다. 칼튼은 가난한 동네다.

이런 차이는 잘사는 나라의 도시에서 흔히 나타난다. 심지어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내에서만 동네에 따라 기대수명 격차가 20년이 난다. 미국의 볼티모어나 워싱턴DC에서도 가난한 동네는 부유한 동네보다 기대수명이 20년이나 짧다. 당연하게 들리지만, 빈곤도와 기대수명은 놀라울 정도로 계층화된 분포를 보인다. 소위 ‘사회계층적 건강 경사면’이라 부른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칼튼은 유럽의 기준으로는 가난한 동네지만, 인도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부유하다. 인도의 1인당 소득은 3300달러로 스코틀랜드의 빈곤선 아래이고, 인구의 3분의 1이 하루 1.25달러 이하로 살아간다. 칼튼에 이런 저소득자는 없으며, 대부분 깨끗한 주거와 화장실, 물, 모자람 없는 음식, 현대적 의료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또 하나, 미국의 15세 소년 100명 중 13명은 60세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는 스웨덴의 두 배다. 이 확률은 코스타리카, 쿠바, 칠레, 페루, 슬로베니아의 확률보다 낮으며 터키, 튀니지, 요르단과 비슷하다. 15세 소년이 60세까지 생존할 확률을 ‘성인사망률’이라 부르는데, 가장 잘살고 최고의 의료시스템을 갖춘 미국은 세계적으로 50위에 랭크돼 있다. 뭔가 모순처럼 여겨진다.

지구촌에서 더러운 물이나 불결한 위생을 의미하는 절대적 빈곤은 줄고 있지만, 상대적 빈곤으로 인한 박탈감이 건강 격차를 만드는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진은 빈부 격차를 보여주는 한 도시의 모습.  동녘 제공
지구촌에서 더러운 물이나 불결한 위생을 의미하는 절대적 빈곤은 줄고 있지만, 상대적 빈곤으로 인한 박탈감이 건강 격차를 만드는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진은 빈부 격차를 보여주는 한 도시의 모습. 동녘 제공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고 이종욱 사무총장이 재임할 때 만든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CSDH)’는 국제적으로 ‘사회 역학(Social Epidemiology)’에 대한 관심을 퍼뜨린 기구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마멋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역학(疫學)·공중보건학 교수는 이 사무총장이 첫 CSDH 위원장으로 임명했던 인물이다. 이 활동을 계기로 마멋 교수는 세계적 사회역학자로 발돋움했고, 영국의사협회장과 세계의사협회장을 지내며 영국 여왕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다.

사회 역학은 질병을 그 자체만으로 보지 않고 사회·경제·정치·환경의 원인을 찾아 ‘건강의 형평성’을 제기하는 학문이다. 학문의 성격상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갖게 마련인데, 마멋은 과학적 근거와 논리에 중점을 두는 학자로 평가된다. 책은 그가 대중적으로 풀어낸 사회 역학 저술이다.

앞으로 돌아가서, 이런 모순은 여러 통계와 연구로 설명이 됐다. 가난한 나라들은 소득이 조금만 높아져도 기대수명이 대폭 길어지는 큰 상관관계를 보인다.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이상이 되면 소득과 생존전망은 상관관계가 거의 사라지고 다른 요인들이 중요해진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절대빈곤’보다 ‘상대빈곤’, 즉 상대적 불평등 개념이 유용하다. ‘상대적 불평등은 역량(capability)에 대한 절대적 불평등을 의미한다’는 저명한 빈곤 연구자 아마티아 센의 정의를 저자는 인용한다.

예컨대 세계은행이 2000∼2001년에 47개국 6만여 명을 대상으로 ‘빈곤의 완화’가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을 때, 응답자들은 기회, 역량, 안정성과 안전성, 존엄 등을 꼽았다. 유럽의 응답자들은 ‘자신이 사회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하는 일들을 할 수 없을 때 자신이 가난하게 느껴진다고 대답했다.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역량’의 박탈감이다. 양상이 달라졌을 뿐 유럽에서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건강과 건강 형평성을 향상시키려면 역량의 박탈을 해소해야 하며, 그 ‘원인의 원인’을 찾는 것이 사회 역학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법은 지역 공동체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고, 일하고, 늙어가는 과정에서 권력, 돈, 자원의 분포를 바꾸는 것, 그래서 물리적, 심리사회적, 정치적 ‘역량’의 박탈 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저자는 각각의 맥락에 따라 책의 장별로 구체적인 사례와 통계를 동원해 독자들을 설득한다. 487쪽, 2만2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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