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맞이한 김민태 회장이 지난 9일 인천 서구 베어즈베스트 청라골프장에서 드라이버로 유연하게 샷을 하고 있다.
고희를 맞이한 김민태 회장이 지난 9일 인천 서구 베어즈베스트 청라골프장에서 드라이버로 유연하게 샷을 하고 있다.
김민태 상명진흥㈜ 회장

김민태(70) 상명진흥㈜ 회장의 골프 구력은 반세기를 헤아린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 야구를 했지만, 이제는 골프가 더 친숙한 운동이 됐다.

야구선수 출신의 김 회장을 지난 9일 인천 서구 베어즈베스트 청라골프장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야구선수로 경기상고를 거쳐 성균관대로 진학했다. 대학 시절 외야수로 활약했고 졸업한 뒤 한일은행과 해병대야구팀에서 근무했다. 김 회장은 얼마 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기록을 확인해 보니 자신의 타율이 ‘3할 7푼 2리’로 돼 있다고 말했다. 김인식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 한일은행 야구팀 동기생이었다는 김 회장은 김 전 감독과는 해병대야구팀에서도 함께 근무했다. 마침 해병대야구팀 감독이 자리를 비우면서 선임이던 김 회장이 ‘감독대행’을 맡아 실업리그 4위였던 해병대를 우승팀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프로야구계를 주름잡았던 김인식, 이희수, 우용득 전 감독 등이 당시 팀의 주축이었다고. 이후 한일은행으로 복귀한 김 회장은 6년 선배였던 김응용 당시 감독의 추천으로 코치가 됐다. 김 회장은 코치 은퇴 후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일본 도쿄지사 직원을 뽑는 시험에 합격해 1975년부터 4년 가까이 근무했다.

김 회장이 골프를 배운 것은 1969년 대학 1학년 때다. 가족이 골프를 접했고, 특히 어머니가 야구선수인 아들에게 권했다. 당시 신당동 집 마당 한쪽에 그물망으로 친 간이 연습장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개인지도를 해주던 홍덕산(2017년 작고) 프로가 집으로 매일 찾아 왔다. 형과 함께 이때부터 어깨너머로 짬짬이 배웠다. 김 회장은 당시 스물을 갓넘긴 팔팔한 야구 선수였다. 힘이 좋아 공을 칠 때마다 그물망이 찢어지기 일쑤였다. 출중한 비거리 덕에 프로들과 자주 어울렸다. 타수는 프로들보다 처졌지만 한 살 아래인 최윤수, 문홍식 프로 등과 함께 자주 라운드했다. 김 회장의 300야드 비거리는 50대까지 이어졌다. 장타 덕에 에피소드도 많다. 골프장이라야 몇 곳 없던 시절이어서 김 회장이 골프장에 가면 으레 아마추어 골퍼들이 프로 지망생이나 프로로 착각해 곁에 있던 프로 대신 장타를 날리는 그에게 레슨을 부탁하기도 했고, 마지못해 ‘프로 행세’를 했다. 김 회장의 베스트 스코어는 30년 전의 73타. 김 회장은 이글은 많이 뽑아냈다. 하지만 50년 가까이 홀인원은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 김 회장은 형, 매형과 함께 야구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골프장에 자주 나가곤 했다.

김 회장은 유복하게 자랐다. 부친이 군함을 만들던 코리아 타코마 조선공업㈜의 창업주였다. 부친은 김종필 전 총리의 셋째 형 김종락 전 대한야구협회회장(2013년 작고)이다. 부친이 “이젠 회사 일을 도와줘야겠다”면서 일본 지사 근무를 ‘지시’했다. 김 회장은 하는 수 없이 은행에 사표를 던졌고, 곧바로 부친 회사의 일본 지사에서 군함 건조에 필요한 플랜트 기술을 도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선박 자재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할 때였다. 코리아 타코마는 미국과의 합작회사였고 한국 측에서 51% 지분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선진 기술을 전수받으며 쾌속정을 제작했다. 경남 마산에 기반을 둔 이 회사는 1990년대 초반 채산성을 맞추지 못해 한진중공업에 합병됐다. 30대 나이에 일본으로 나갔다가 40세가 넘은 1992년 국내로 돌아온 김 회장은 이후 회사를 설립해 선박회사의 구조물을 만들어 조선소에 납품했다. 외환위기로 부산에서 해오던 선박 플랜트 사업도 접었다. 이후 경남 통도사CC 등 보유하던 회원권을 매각한 이후 10년 동안 골프를 하지 않았다.

김 회장은 재기를 노렸지만, 좀체 기회가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김 회장은 12년 전이던 2005년 건강검진에서 대장암이 진단돼 3기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울적했고 갑갑했다. 등산을 시작했지만 걷기조차 어려웠다. 의사를 찾아갔더니 차라리 골프를 하라고 권했다. 김 회장은 10여 년 만에 골프채를 다시 잡았다. 암 수술 후 골프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건 기적이었다. 하지만 기력이 많이 떨어진 탓인지 비거리는 확 줄었다. 김 회장은 “그 뒤 매년 10야드씩 줄어든 것 같다”며 “요즘엔 200야드를 넘는 데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야구 꿈나무의 산실 리틀야구연맹에 심판으로 봉사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매일 야구 경기가 열렸기에 다시 야구판으로 돌아온 게 좋았다.

건강을 회복한 김 회장은 사업을 재개했고, 얼마 후 경기 의정부역사 개발에 참여했다. 당시 신세계그룹 고위간부가 일본지사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인연으로 토목공사를 맡을 수 있었다. 삼성 출신이던 이 임원은 도쿄지사 근무 시절 서울 비서실로부터 이병철 회장의 골프채를 사 달라는 부탁을 들을 때마다 김 회장에게 추천을 의뢰했다. 시타를 맡긴 다음 “사도 괜찮다”는 김 회장의 말이 나오면, 그 임원이 곧바로 골프채를 사 서울 비서실로 전달했다.

김 회장은 2009년부터 건축물 관리 회사 용역업체인 상명진흥㈜을 운영하고 있고, 지인과 함께 약품 유통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김 회장은 “지금은 덤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기분”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얼마 전부터 경기 용인의 선봉대 군 골프장에서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과 가끔 만나고 있다. 김 회장은 또래의 야구인 중에서 김 협회장과 자웅을 겨루는 몇 안 되는 실력파. 카트가 없는 이곳을 걸으며 7∼8월 불볕더위에도 둘만의 라운드를 즐겨왔다. 김 회장은 “이젠 잘 치고, 멀리 보내는 걸 뽐내기보다 행복하고 편안하게 운동을 즐기고 있다”면서 “하지만 친구들과의 라운드를 앞두곤 꼭 연습장에서 칼을 갈고 나간다”고 말했다.

글·사진 =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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