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권 전국부장

국회 부의장을 지낸 이용희 전 민주통합당 의원은 1987년 개헌안을 만든 ‘8인 정치회담’의 한 명이다. 그는 김대중(DJ)의 대리인으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8인 정치회담)에 참가해 한 달(7월 31일∼8월 31일) 만에 개헌안을 만들었다. 짧은 기간 개헌안을 만든 경험이 있는 이 전 의원이지만 현재 추진되는 개헌을 보면서 “늦었다”고 했다. 쟁점과 이견을 정리하고 국민 합의를 끌어내야 할 정치권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 게 이유다.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 투표가 함께 치러지는 내년 6월까지 얼렁뚱땅 시간을 때우다가 막판에 정치적 타협으로 개헌안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8대와 19대 국회를 거치면서 개헌 준비는 많이 돼 있다. 국회 헌법개정특위는 이전 연구를 토대로 개헌 방향을 기본권 보장 강화, 권력구조 개편, 지방분권 강화 등 크게 세 가지로 잡고 △헌법 전문 및 총강 개정 △생명권 등 기본권 신설 및 강화 △지방분권 강화 △분권과 협치에 기초한 정부 형태 개편 △입법부의 책임성 제고 △선거제도 개편 △사법부 독립성 강화 등 11개 주요 의제를 선정해 놓았다. 또한, 의제마다 분야별 쟁점을 정리하고 그동안의 찬반 토론 결과와 외국 사례 등을 총정리한 자료집까지 내놓았다. 상은 다 차려진 셈이다. 하지만 개헌은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권에서 멀어지는 분위기다.

이번 개헌은 일상적 시기에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거치며 국민의 참여 속에 이뤄지는 첫 개헌이라는 의미가 있다. 헌법은 1948년 제정 이후 9차례 개정이 이뤄졌지만 모두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진행됐다. 한국전쟁 때 무장 경관이 겹겹이 포위한 상태에서 공고 절차도 없이 기립 투표로 진행된 ‘1차 개헌’과 ‘4사 5입’ 편법으로 유명한 2차 개헌을 비롯해 3·4차 개헌은 4·19 혁명 직후에 이뤄졌다. 5·16군사정변 이후의 5차 개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한 6·7차 개헌, 10·26 사태 직후의 8차 개헌, 6월 민주항쟁의 결과물인 9차 개헌도 정상적인 절차를 거쳤다고 보기 힘들다.

개헌특위는 지난 8월부터 국민 여론 수렴 차원에서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개헌 공청회를 열고 있지만, 기대만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지방에서 자생적 개헌 추진 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지난 13일 대구에선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지방분권 개헌을 촉구하는 범시민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지방분권 국가임을 헌법 1조에 천명하고, 주민 자치권을 기본권에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자체 개헌안을 만들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30년이 지난 1987년 헌법의 수명이 다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새로운 헌법에 ‘분권’과 ‘통합’ ‘협치’라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국민 통합과 백년대계의 미래상을 담아야 한다는 것은 당위론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의 활발한 참여와 토론이 담보돼야 한다. 개헌에서 소외된 국민이 거리에서 촛불을 든다면 이번 10차 개헌도 이전 개헌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이번 개헌은 갈등과 분열, 증오와 차별을 모두 녹여내는 용광로여야 하고, 새로운 희망을 밝히는 빛이 돼야 한다.

ybk@
유병권

유병권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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