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의 뿌리를 찾아 온 나라가 들썩인 추석 명절, 그 긴 여정이 끝나고 다시 일상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얽히고설키며 이어가는 인연의 고리들로 연결되어 있다. 인생에 있어 인연의 소중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인연들에 대한 가치의 순위가 바뀌고 또 어떤 인연들은 정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배우 인생 60년이 넘는 나도 다양한 인연들과 얽혀 있지만 그 많은 인연 가운데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귀촌 각시’다.
10여 년 전,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공연을 끝내고 분장을 지우고 있는데,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한 아가씨가 프로그램에 사인을 해 달라며 들어왔다. 순수한 그 모습이 이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그만 울라고 다독이며 정성껏 사인을 해 주었다.
‘벽 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 때 사상범으로 몰려 벽 속에서 40년간 숨어 살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 딸이 소설로 쓴, 스페인에서 일어난 실화이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배삼식 작가가 벽 속에 갇힌 아버지의 설정만 그대로 두고 1950년을 전후로 40년에 걸친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곁들여 새롭게 써낸 창작 뮤지컬이다.
40년의 힘들고 긴 세월을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외치며 긍정의 힘으로 버텨내는 엄마, 40년 동안 벽 속에서 보낸 뼈아픈 세월을 가족의 사랑으로 이겨낸 아버지, 그리고 벽 속의 아버지를 요정으로 믿고 꿋꿋하게 잘 성장한 딸의 이야기를 12곡의 아름다운 노래와 32역으로 변신하는 연기로 눈물과 웃음을 버무려 선보이는 모노 뮤지컬이다.
2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마음으로 소통하며 뜨거운 응원을 보내준 관객들의 힘으로 14년째 공연되고 있는 나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온갖 상을 휩쓴 영예와 14년간 찾아준 많은 팬, 그리고 미국·중국·일본 등 해외 공연에서 만난 귀한 인연들이 있지만, 그중 귀촌 각시야말로 벽 속의 요정이 맺어준 관객 속의 요정이었다.
공연 때마다 빠짐없이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지와 식구들까지 공연장으로 끌고 온 홍보대사이기도 했다. ‘배우 김성녀의 미학’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나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이야기, 그리고 50년이 넘는 나의 모든 흔적을 거미줄처럼 엮어 거기에 본인의 관점으로 찬사를 펼치는 황홀한 블로거이기도 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긴 편지를 즐기는 그녀의 글솜씨가 부러웠다.
알고 보니 아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책, 마음의 양식이 되는 건강한 책, 돈이 되지는 않지만 누군가 만들어야 하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좋은 책들을 만드는 출판사 사람이었다. 노래 부르기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그녀는 통기타를 들고 위안이 필요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소박한 노래꾼이기도 했다. 불의를 못 견디는 그녀는 갑의 횡포에 부당해고를 당한 서민들을 위해 목청 높이며 밤을 지새웠고,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항변으로 밤을 불태우는 정의의 사도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공연장을 찾아와 좋은 공연이었다고 눈시울을 적시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는 낭만파이기도 한 그녀. 홍길동처럼 여기 번쩍, 저기 번쩍하며 마치 투사처럼 모든 일을 감당하던 나의 요정이 갑자기 사라졌다. 귀촌(歸村)을 한 것이다.
전혀 믿을 수 없는 행보지만, 그녀의 옆지기로 통하는 남편과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귀촌 각시가 된 것이다. 책 만들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투쟁하던 뜨거운 삶을 접고, 땅을 만지며 자연에 순응하는 삶에 푹 빠져 있다. 고향 손님들 여럿 다녀간 긴 연휴 끝에 일상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들을 페이스북에 늘어놓는다.
가지를 썰어야 하고, 고추 딴 거 정리해야 하고, 고추나무 가지나무 뽑은 자리에 김매기를 해야 하고, 마늘 심을 거 갈라야 하고, 매실액도 정리해야 하고, 훌쩍 자란 부추 좍 뜯어다 부추김치도 만들어야겠고….
저 남쪽 한적한 농촌으로 귀촌해서 몇 년이 지난 동안 사계절이 주는 농촌의 갖가지 농사일을 마치 귀촌일기처럼 페북에 올린다.
그녀의 글을 통해 농사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를 얻고 가뭄과 장마로 애끓는 농부의 마음을 이해하며, 실패의 경험을 통해 정성과 사랑으로 노력해야만 결실을 보는 생명의 소중함까지 공유가 된다. 노동의 고단함이 묻어나 안쓰럽지만 서툰 농부의 손으로 열매를 맺는 모든 농작물이 너무나 소중하게 와 닿고, 이상하게도 그 모든 행보가 신선놀음처럼 느껴지는 마법이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열로 뜨겁던 젊은 부부가 왜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농부가 되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치 낙원에서 사는 것 같은 행복함과 평온함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
요즘 세상이 참으로 흉흉하다. 같은 민족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고, 가족 간의 연대가 붕괴되고, 정치인들은 오로지 선거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사회 곳곳이 이해가 얽혀 거칠고 폭력적이며 혼란스럽다. 혼란이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눕고 싶은 정서가 새삼 배어나는 법. 귀촌 각시의 찬가가 불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골수 팬은 놓쳤지만 용감하게 자기 삶을 설계한 그들이 부럽다. 삶이 연극이라면 박수를 받을 일은 그들의 용기다. 귀촌 각시의 흙냄새를 맡으러 훌쩍 떠날 용기라도 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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