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광훈의 미학 에세이… 悲歌的 행복 - 푸생의 아르카디아 (2)
니콜라 푸생은 지방에 사는 가난한 소지주의 아들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앙리 4세 치하에서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18~20세 무렵 그는 루앙과 파리에서 화가 교육을 받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기 길을 하나하나씩 개척해간다. 그 같은 경로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마리노(Marino)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이 시인을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나 오비드의 ‘변신’에 나오는 그림을 그려주었고, 마침내 그의 도움으로 로마에 갈 수 있었다. 더욱이 마리노는 그를 이탈리아로 초대하여 로마에 사는 여러 문인이나 학자, 나아가 유력자와 만나도록 주선해주었다.
# ‘이상화된’ 현실 - 에센스의 세계
하지만 로마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림의 주된 구매자들, 이를테면 교황이나 주교 같은 고위성직자나 돈 많은 귀족 가문의 사람들, 혹은 바티칸의 프랑스 대사 같은 유력 정치가들은 이미 활동 중인 더 명망 있는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귀도 레니(G Reni)나 카라치(Carracci)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좋아진다. 마리노가 한 추기경을 소개하면, 이 추기경은 또 다른 추기경과 교황을 소개하고,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베드로 성당의 제단화를 주문하였기 때문이다. 푸생은 1641년 47세 때 프랑스의 왕 루이 13세의 요청으로 파리로 가지만, 이듬해에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그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에서 보냈고, 결국 로마에서 죽는다. 그러니 로마는 그의 고향과 다름없었다. 그가 프랑스 화가인지, 아니면 ‘로마 화가’로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는 그래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푸생을 로마 화가라고 부를 때, 이때의 로마란 ‘이상화된’ 로마다. 푸생 그림 속의 로마는 실제 장소라기보다는 그가 꿈꾸고 갈망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푸생 그림은 대체로 로마에서 그려졌다. 그는 로마의 산과 들녘을 돌아다녔고, 이런 풍경을 기록한 책과 시를 읽으면서 그 영감과 이미지를 얻었지만, 그것은 현실의 로마가 아니었다. 그가 그린 것은 ‘영원한 도시’로서의 로마였고 ‘이념’으로서의 로마였다. 이것은 수많은 시인과 작가가 그린 비현실적이고 이상화된 고대 - 유토피아로서의 과거였다. 왜냐하면 이 유토피아적 고대야말로 삶의 에센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은 이념과 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푸생에게 이념은 현실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에센스는 어떤 시대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방해받지 않은 채 원래의 완전한 모습 그대로 전승되어 마땅하다.
우리가 푸생의 그림에서 현실적 로마를 볼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의 그림에서는 1600년대 로마의 사회·정치적 현실이나 종교적 건축물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전원시적 풍경에 대한 푸생의 사랑과 회한, 체념과 갈망을 읽는다.
그리고 이 갈망은, 앞서 언급했듯이, 호머 이래로 버질이 노래한 바이기도 했고, 괴테와 실러가 희구한 바이기도 했다. 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과 시적 비전이 없다면,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궁색할 것인가?

사실 푸생만큼 평생에 걸쳐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 세계를 헌신적으로 탐색하고 표현한 화가는 그의 동시대에 드물 것이다. 이것은 그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이나 소재가 온갖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며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주제로 가득 차 있다는 데서 이미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다. 이렇게 선택된 주제의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대상은, 그것이 옷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무기든 간에, 더 없이 꼼꼼하고 정확하다.
푸생은 그 당시 프랑스어로 번역된 오비드의 책뿐만 아니라, 로마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고대 신화의 내용에도 정통하였다. 심지어 로마의 지하납골당에서 발굴된 초기 기독교 유물에 대해서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폭넓은 학습을 통해 그는 그림 속 인물들의 몸짓과 태도, 표정과 자세에 인문주의적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말, “나는 그 어느 것도 무시하지 않았다”는 자주 인용된다. 그는 고전적, 이상적, 유토피아적 비전과 관련된다면 그 어떤 것도 가볍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광범위한 전거(典據)와 문헌학적 관련성 때문에 그 그림을 해석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림 속의 많은 요소가 갖가지 일화나 알레고리와 연결되어 있고, 그러니 만큼 그 도상학적 내용은 관찰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예술사가 젤로(G Sello)는 이렇게 설명한다.
“억제된 몸짓과 자제된 감정은, 푸생에 따르면, 진지하고 지혜로운 것인 도리스적(dorisch) 어투로부터 나온다. 철학적 차원은 그의 회화에서 서정적, 음악적 차원과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서로에게 속하면서 공통된 배경을 이루는데, 이 배경 앞에서 신화와 성경의 인물들, 이교도적 신과 기독교적 복음서의 저자들, 모세와 디오게네스는 적절하게 필요한 겸양 속에서 행동한다. 도리스식 방식의 지혜는 스토아의 고대적 가르침인데, 이 가르침을 그는 17세기 로마에서 알게 되었고, 그 가르침은 그의 친구나 주문자 모임에서 자주 토론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정열과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침착함과 마음의 평정 그리고 비가적 행복감을 푸생은 하나의 유토피아적 고대인 아르카디아에서 찾아내었다.”(Gottfried Sello, Die Gegenwart der G?tter im Licht der Farbe, Die Zeit, 1978. 2. 3)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네 가지다. 첫째, 이른바 다섯 양식규칙(Moduslehre) 가운데 푸생이 즐겨 적용한 것은 도리스식이고, 그것은 엄격하고 진지한 주제에 적합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엄격성과 진지성은 그의 고전적 취향과도 어울린다. 그래서 서로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 마치 기독교의 모세와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가 함께 어울리듯이, “적절하게 필요한 겸양 속에서” 어울리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 푸생이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를 “그의 친구나 주문자 모임에서 자주 토론”하였다는 사실과 이어진다.
# 침착과 평정
그러나 이 세 가지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 - “침착함과 마음의 평정 그리고 비가적 행복감을 푸생은 하나의 유토피아적 고대인 아르카디아에서 찾아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가 어떤 주제의 그림을 그렸던 간에, 그것이 종교적 그림이든 풍경화든, 아니면 신화든 관계없이, 그 모든 것에는 죽음과 지혜에 대한 17세기의 신스토아주의적 절제가 들어있다. 이 절제는 그의 그림에 고전적 품격 - 합리적 선명함과 혁신적 힘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푸생의 그림에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 결국 느끼는 것도 “침착함과 마음의 평정 그리고 비가적 행복감”일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순수한 행복이나 완전한 행복이 아니라 ‘비가적 행복’의 의식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슬픈’ 것은 우리가 원래의 행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행복’이어야 하는 것은 이런 상실 속에서도 행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땅 위의 행복은 ‘사실’이 아니라 ‘요청’으로서 자리한다. 인간의 행복은, 그것이 보장하고 실현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한 없어서는 안 되기에,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말하는 것은 사실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행복은 삶의 존엄성에 필수적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조건이다.
푸생의 그림에는 어떤 이유로도 변치 않을 무엇 - 우리가 살아가는 한 존재하고, 존재하는 한 껴안고 가야 할 불변의 고귀한 것들 - 상실의 감정과 그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들어있다. 낙원이 더 이상 이 땅에서 불가능하다면, 우리에게 이제 남겨진 것은 상실된 낙원에 대한 기억이고 표현이며, 이 시적 표현 속에서 시도되는 또 다른 방식의 실천적 가능성이다. 아마도 푸생의 묘비명에 ‘에트 인 아르카디아 에고’가 적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죽음 혹은 소멸의 전능(全能)에 대항하는 인간의 한 방식이고, 이 표현적 실천을 통해 그는 삶의 허망함을 이겨내려 한다.

푸생의 그림은 사라진 낙원에의 이 인류사적 꿈을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고요한 평정 속에서 구현한다. 아르카디아의 두 번째 그림에서 무릎 꿇고 해독하는 양치기의 손가락이 가 닿은 곳에는 짙은 그림자가 져 있다. 이제 낙원은 그림자 안에서만, 오직 그림자의 형태로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인가? 현대의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낙원의 실현 자체가 아니라 그 실현의 전적인 불가능성을 잊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낙원의 전적인 불가능성에 대한 상기만이 현대인에게 남겨진 ‘유일하게 낙원적인’ 실천인지도 모른다. 그 그림은 비록 사라진 낙원을 상기하는 슬픈 장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기억의 장면 그 자체로 또 다른 형식의 유토피아적 비전이 아닌가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푸생의 아르카디아 그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읽기와 해석하기일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이미 사라진 것으로서의 낙원을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비록 이들 역시 언젠가는 죽어가겠지만, 그럼에도 그 흔적을 읽고 해석해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독해 속에서 어떤 실천적 가능성 - 더 나은 삶의 윤리적 가능성도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사는 현실이 낙원이기는 어렵다. 시적 비전의 총체로서의 낙원은 아마도 여기 이곳의 인간적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낙원에서도 죽음과 소멸은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이곳이 낙원이라고 하여도 삶의 한계는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읽는 바로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고, 앞으로 언젠가는 죽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저 읽고 생각하며 해석하고 꿈꾸는 일, 그래서 그런 해석에서 깨달은 내용을 실천으로 조금씩 전환해 가는 일일 것이다. 자유란 이러한 전환 - 감각이 사고로 수렴되고, 사고가 실천으로 전환되는 변형적 계기를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자유가 삶의 실존적 변형, 이 변형을 통한 일상의 지속적 재편(再編)이 아니라면, 무엇일 것인가?
그러나 이 일이 쉽게 성공하긴 어렵다. 그것은 여러 차례의 반성적 회로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실패할 공산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가 하찮다고, 그래서 없어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상실된 낙원의 독해작업은 낙원 자체만큼이나 아름다울 수도 있다. 낙원에의 시적 비전은 낙원 이상으로 진실될 수 있다.
그렇게 낙원의 흔적을 쫓아가면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일 자체가 우리의 영혼을 상승적으로 이행시켜주기 때문이다. 상승적 이행 속에서 영혼은 이미 아름답다. (문화일보 9월 19일자 20면 7 회 참조)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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