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로부터 누구를 뽑아 달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역대 정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에요.” 한 언론단체의 전언이다. 이 단체 대표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을 뽑는 이사 중의 한 사람이다. 이번에 뽑힌 민병욱 언론재단 이사장은 문재인 대선캠프에서 일했던 인물이다. 재단 이사들이 정권의 눈치를 봤다는 구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정권이 이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긍정적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있었던 일을 돌아보면 한 단계 나아간 모습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4년, 언론재단 이사회는 청와대에 반기를 들었다. 정권이 친노 인사인 S 씨를 밀고 있음을 알면서도 P 씨를 이사장에 연임시킨 것. 왜 그랬을까. 양정철 당시 청와대 언론담당 비서관의 전화가 무례한 압박으로 받아들여졌던 탓이었다. 재단의 한 이사는 “양 비서관이 ‘우리는 S 씨로 정했습니다’라고 통보하듯이 말했는데, 권력의 오만을 느꼈다”라고 했다. 그 이사는 노 정부 지지자였으나, 권력이 언론을 하수인으로 여기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청와대의 압력 논란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불거졌다. KBS의 김경민 이사가 사퇴한 것을 두고 청와대 실세가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김 이사가 현 야권 측 인사이기 때문에 여권 측 이사 숫자를 늘리기 위해 그를 물러나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다. 그럼에도 의혹이 수그러들지 않는 것은, 현 정부가 내세운 방송 개혁이 친(親)정권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 때 방송법 개정안을 부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만약 이 법(방송법 개정안)이 통과가 된다면…(방송사 사장에)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 문 대통령은 방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야권 추천 이사 비율을 높인 방송법 개정안을 지키겠다고 수차례 다짐했다. 그걸 뒤집은 것이다. 본의가 잘못 전달됐다며 청와대가 해명했으나, 대통령의 발언은 방송사 사장에 내 편을 심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읽혔다. 새로 임명된 방송통신위원장이 그 발언을 국회에서 복창한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현 정부는 지난 정권이 공영 방송을 훼손했다며 방송 개혁 의지를 강조해왔다. 거기에 동조하는 KBS, MBC 노조가 달포째 파업을 하며 현 경영진과 야권 추천 이사들의 퇴진을 압박해왔다. 그 결과 양 방송 사장을 뽑는 방송문화진흥회와 KBS 이사회 개편이 가속화하고 있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친정부 인사가 새 사장에 선임될 것으로 관측되지만, 진통이 불가피할 것이다. 정권이 이런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또 할 것인지는 무척 중요하다. 분명한 것은, 힘의 행사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 개혁을 빨리 이루기 위해 내 편의 인물을 심어 조종하고픈 욕구를 참아야 한다. 그것은 온갖 불이익을 감내하면서도 공정 방송을 외쳤던 방송인들을 홍위병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성공을 잇고 실패는 넘어서겠다고 했다. 방송과의 관계도 진전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권력이 지침을 시사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 말고, 방송인들이 스스로 개혁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정부의 바른 태도다.
jeij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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