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우리말에 들어온 ‘삐라’라는 말은 전쟁과 숙명적인 인연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은 무솔리니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정규전과 함께 비정규전을 병행했다. 너무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비참한 심정으로 전장(戰場)에 끌려온 병사들의 마음을 군 지휘부로부터 돌려세우는 삐라 전술이었다. 모두 200만 장이 넘는 삐라가 이탈리아 전역에 뿌려졌다. 그 위력은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6·25전쟁에서도 삐라전은 계속돼 전쟁 기간 남북 합쳐 28억 장의 삐라가 뿌려졌다. ‘현대판 사면초가’ 전략이라 할 삐라전은 전세를 유리하게 만드는 고전적 심리전의 하나다.
삐라의 나이는 적어도 120세는 된다. 1890년대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라틴어 빌라(billa)가 어원인 영어의 빌(bill)을 ‘쇼조(招帖)’ 또는 ‘비라(ビラ)’라고 한 게 처음이다. 영어 빌은 계산서, 청구서, 목록 등의 뜻도 있지만, ‘삐라’에 해당하는 ‘전단, 벽보, 광고’ 등의 뜻도 있다. 물론 지폐, 어음, 법안, 신고서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삐라의 어원과 관련, (종이) 쪼가리를 가리키는 일본어 비라(片), 또는 펄럭펄럭이란 뜻의 의태어 비라비라(びらびら)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오늘에는 한자로 전단(傳單)이라 바꿔 쓰는 일본과 중국에서는 각각 ‘덴탄’, ‘촨단’이라 한다.
우리는 국어순화운동에 따라 1979년 ‘전단(傳單)’이란 말과 함께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1993년 2월 12일 발간된 행정용어 순화 편람에서는 ‘전단’으로 바꿔 쓰도록 했다. 2년 뒤인 1995년 10월 7일 총무처의 행정용어순화위원회는 전단이란 말을 ‘알림 쪽지’로 고쳤다. 그 반면, 북한에서는 삐라가 그들의 표준말 문화어다. 북한의 사전에서는 ‘들어온말’로, 광범한 인민대중을 선동하거나 적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종이에다 짤막하게 쓴 선동문 또는 그러한 선동문이 담긴 개개의 종이장이라고 풀이한다. 흔히 삐라를 ‘종이폭탄’이라고 하는데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최근 청와대 춘추관 앞 잔디밭 등지에서 발견된 60여 장의 삐라는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올 들어 11차례나 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 아니다. 군 최고통수권자의 집무실 경내에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는 삐라가 발견됐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종이폭탄이 신경가스 같은 생화학무기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