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측도 열람 인정
1심, 효력 반영 안해
상계못한 하청 워크아웃 몰려
법조계 “법률 형식주의 한계”


STX중공업의 하청을 받아 사우디아라비아 제강공장을 건설했던 S기업이 대한상사중재원과 법원 등의 연이은 부작위(不作爲·마땅히 할 것으로 기대되는 조치를 하지 않음)와 형식주의적 법률 해석 등으로 워크아웃 위기에 놓이게 됐다. 특히 법률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표현을 제대로 했는지, 이를 상대방이 이해했는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법적 관료주의가 한 기업을 생사기로에 놓이게 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전자소송으로 이뤄지는 민사·회생 사건 등의 경우 의사표시 도달 방식에 대해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 제기다.

서울고법 민사19부(부장 고의영)가 지난 20일 주재한 항소심 첫 변론기일에서는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일한 종류의 채권을 갖고 있을 경우 서로에게 갚을 돈을 상쇄하는 법률행위인 ‘상계(相計) 의사표시’ 도달 문제가 쟁점이 됐다. STX중공업이 S기업에 대해 제기한 공사지연 손해배상 채권 강제집행 판결 청구 소송이다. 앞서 6월 1심은 원고 측 승소 판결을 내려, S기업은 연체이자까지 합쳐 52억 원가량을 STX 측에 지급해야 한다.

애초 S기업은 오히려 STX에 대해 ‘받을 돈’이 더 많은 상황이었다. 지난해 S기업이 STX에 대해 공사대금을 달라며 대한상사중재원에 중재신청을 접수하자 STX는 S기업이 공사지연에 따른 손해배상금을 줘야 한다며 맞섰다. 중재원은 30일 이내에 판정을 내려야 한다는 훈시규정을 어기고 7개월 가까이 해당 사건을 끌었다.

중재 결과 S기업은 STX로부터 42억 원가량, STX는 S기업으로부터 약 38억 원의 채권이 발생했다. 이후 중재원이 이를 상계 처리하지 않고 각각의 채권 액수를 따로 명시했던 게 문제의 발단이 됐다. 중재 판정 3일 만에 STX가 회생절차에 돌입하면서 S기업의 STX에 대한 채권은 언제 변제받을지 알 수 없는 회생채권이 돼버렸지만, STX는 즉각 S기업에 대해 채권 집행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S기업은 회생법원에 STX에 대한 회생채권신고서와 상계신청서를 함께 제출했다. 그러자 STX 측은 대법원 판례에 따라 상계 의사표시는 STX 관리인에게 직접 송달해야 효력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S기업은 STX 측에서 회생법원에 제출하도록 안내해 그대로 따랐을 뿐이며, 온라인상에서 STX 측이 이를 열람·검토했다는 흔적이 나오기 때문에 상계 의사표시가 도달된 것이 맞는다고 맞서고 있다. S기업은 상계신청서를 접수한 회생법원이 이를 STX 관리인에게 제출해야 한다고 따로 알려주지 않은 점도 문제 삼고 있다.

이날 2심 재판부는 “STX의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회생법원에 회생채권신고서와 상계신청서를 접수했고, 상대방인 STX가 이를 열람했다는 기록이 있느냐”고 묻자, STX 측 변호인은 “열람했다는 사실을 다투지는 않겠다”며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측의 채권신고서 및 상계신청서가 회생법원에 제출된 후 어떤 절차로 STX측에 전달됐는지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므로 이에 대한 추가 소명을 해달라”고 말해 S기업의 기대를 높였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민법 제111조에서 규정한 의사표시 도달 여부에 대해 대법원 판례는 상대방이 객관적으로 인식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판시하고 있다”면서 “상대방이 정식으로 열람한 기록이 남았다면 의사표시가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리안 기자 knr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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