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논설주간

선거는 시(詩)로, 국정은 산문(散文)으로 한다(campaign in poetry, govern in prose). 미국 정치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득표를 위해서는 고상하고 명료한 말로 희망을 외치면 되지만, 집권 이후에는 타협은 물론 뒷거래도 불가피해 설명이 길어진다는 의미다. 이미 2000여 년 전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다. 공약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집권 전·후의 관점과 접근 방향, 추진 주체를 달리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경구(警句)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6개월을 맞는다. ‘산문 정치’와 마상불치(馬上不治)의 길을 가고 있는가. 취임사의 기조는 옳았다. 우선,‘촛불’ 두 글자가 없다. 그 대신 “2017년 5월 10일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이라며 ‘겸손한 권력’을 약속했다. 야당을 향해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다”, 인사와 관련해선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관계없이 훌륭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일을 맡기겠다”고 했다. “대통령부터 신뢰 정치 솔선수범”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다” “주요 사안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겠다”고 했다. 차별·특권·반칙 없는 세상을 외치면서 보수·진보 갈등 해소도 강조했다.

지도자의 언어는 리더십의 요체다. 비전과 진정성, 통합과 솔선수범 등이 주요 덕목이다. 그런데 취임사에 비쳤던 그런 분위기는 사라지고 있다. ‘후보’ 시절의 용어와 주장이 다시 넘쳐난다. 권력 행사가 세련되어지긴커녕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청와대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오만하고 권위적으로 변하는 게 역대 권력자들의 경향이었는데, 그런 행태가 재현될 위험성이 보인다. 이젠 ‘촛불혁명’을 입에 달고 다닌다. 적폐청산 TF들이 우후죽순 신설돼 박근혜·이명박 정권의 정책까지 불온시한다. 권력을 배경으로 한 ‘완장’ 행태는 홍위병을 떠올리게 한다. 친정부 단체들까지 가세한 기세를 보면 어느 친문 원로의 ‘보수 궤멸론’이 빈말만은 아닌 듯하다. 탕평은 고사하고 내각인지 ‘캠프’인지 헷갈릴 정도다. 홍종학 사례에서 보듯 ‘내로남불’을 반성하긴커녕 뭐가 문제냐고 우긴다. 사법권력 구성에도, 탈원전 강행에도 ‘코드’가 우선이다.

예외 없이 반복됐던 ‘권력 말년의 불행’을 피하려면 이런 퇴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적폐 청산 자체를 목표로 삼아선 안 된다. 청산을 위한 청산은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부를 뿐이다. 청산에 나서려면 ‘내 편’에 더 엄격해야 하고, 제도 개선 등 미래지향적 대안이 병행 추진돼야 한다. 둘째, 대선 승리를 모든 공약에 대한 지지로 착각해선 안 된다. 그나마 지난 대선에선 보수 정치의 자멸로 공약 경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무리한 공약 시정에 인색할 이유가 없다. 셋째, ‘나라다운 나라’ 구호에 내포된 왜곡된 역사관을 직시해야 한다. 건국과 산업화 세대의 위대한 성취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폄훼와 박근혜·이명박 정권 ‘부관참시’도 그 연장으로 비친다. 거친 권력 행사는 반드시 반작용을 키우게 된다.

취임 초 반년은 5년 임기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는 골든타임이다. 그런데 과거와의 싸움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정작 해야 할 일엔 소홀할 수밖에 없다. 국정의 궁극적 목표는 더 나은 미래를 여는 일이다. 이를 위해 대통령은 고독한 결단을 해야 한다. 어려운 결정을 하라고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다. 껄끄러운 문제를 공론화위원회에 떠넘기는 것은 직무 유기와 책임 회피다. 여소야대 국회의 비효율이나 야당의 발목잡기를 핑계로 ‘촛불 민주주의’에 기댄다면 위험하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70%를 오르내리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야당 지리멸렬에 따른 반대급부든 ‘이벤트 정치’ 덕분이든 상관없다. 혁명보다 어렵다는 진정한 개혁을 추진할 국정 동력이 살아 있으면 된다. 내년 6월엔 지방선거가 있고, 개헌까지 맞물리면 동력은 순식간에 떨어진다. 진보 대통령이 복지·노동 개혁을 더 잘할 수 있다. 다시 출마하지 않을 단임 대통령에겐 여·야를 모두 초월해 국정을 소신껏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금을 퍼붓는 복지는 당장 박수를 받겠지만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독일 사민당 정권이 이뤄낸 ‘어젠다 2010’과 하르츠 개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과거와 싸우느라 개혁 골든타임을 소진할 여유가 없다.
이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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