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감자’의 주요 배경이 된 평양 칠성문 풍경. 1935년 촬영된 모습(왼쪽)과 최근 풍경(오른쪽)은 겉보기엔 다르지만, 일제강점기와 북한 전체주의 체제의 시대적 비극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자료사진
소설 ‘감자’의 주요 배경이 된 평양 칠성문 풍경. 1935년 촬영된 모습(왼쪽)과 최근 풍경(오른쪽)은 겉보기엔 다르지만, 일제강점기와 북한 전체주의 체제의 시대적 비극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자료사진

(100) 김동인 소설 ‘감자’의 배경… 평양 칠성문

‘싸움·간통·살인·도적·구걸 등
이세상 모든 비극·활극 출원지’
첫 문장 작품내 강력한 힘 발휘

북한국보유적 제18호인 칠성문
문밖 빈민촌은 시대변화서 소외
시대와 담 쌓고 낙후돼가는 곳

중국인 대한 적대 팽배했던 평양
작품속 惡人 왕서방 등장의 배경
시대가 만들어낸 집단無知 그려

김동인, 8代 이은 평양 토박이
평양사람 중심 문예지까지 창간
대부분 작품 배경…남다른 애정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은 8대를 평양에서 내리 살아온 평양 토박이다. 아버지 김대윤은 교회의 장로이자 평양의 유지이고 개화한 지식인이었다. 평양 성내 400여 평의 대저택에서 둘째 부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김동인은 평양에서 나고 성장했으며, 이후에도 한동안 평양에서 생활한 평양 사람이다. 김동인이 창간한 최초의 문예지 ‘창조’가 평안도, 그중에서도 평양 사람 일색인 것도 김동인의 평양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증명한다. 이러한 작가의 이력에 걸맞게 김동인의 작품에는 평양을 배경으로 한 것이 여러 편이다. 대표작인 ‘배따라기’나 ‘감자’는 물론이고, ‘마음이 옅은 자여’ ‘눈을 겨우 뜰 때’ ‘여인’ ‘김연실전’ 등이 모두 평양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김동인의 대동강에 대한 유별난 사랑을 대변하듯이, 대부분 작품의 배경은 청류벽, 모란봉, 을밀대 등의 명승지로 이름 높은 대동강변이다. ‘감자’(『조선문단』, 1925.1)에서는 김동인이 즐겨 그린 대동강 대신 칠성문 밖 빈민촌이 주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칠성문 밖 빈민촌은 대동강 상류의 명승지에서 풍겨 나오는 멋이나 낭만과는 거리가 한참 먼 곳으로서, 삶 이전의 벌거벗은 생존만이 문제가 되는 공간이다.

‘감자’는 “싸홈, 姦通, 殺人, 도적, 求乞,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出源地인, 이 七星門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福女의 夫妻는(士農工商의 第二位에 드는) 農民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굳이 읽기 어려운 원문까지 인용하는 이유는 이 문장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마자 받은 ‘제 아비를 죽이고 제 어미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에 버금갈 정도로 작품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칠성문 밖 빈민굴에서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출원지’라는 신탁을 증명하는 칠성문의 오이디푸스가 바로 ‘감자’의 주인공 복녀(福女)이다.

김동인은 그 유명한 ‘소설작법’(『조선문단』, 1925.6)에서 소설의 이상적인 플롯을 “목적지를 향하여 곁눈질 안 하고,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말에 비춰보자면, ‘감자’는 신탁의 실현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나가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복녀는 칠성문 밖 빈민굴에 오기 전까지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나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저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칠성문 밖 빈민굴에 온 이후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15세에 홀아비에게 팔려 시집을 간 복녀는 소작농, 막벌이 일꾼, 행랑살이 머슴을 전전하다가 19세에 드디어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온다. 이후 복녀는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빈민굴의 다른 사람처럼 구걸을 하고(구걸), 기자묘 송충이잡이에 나갔다가 처음 매춘에 나서고(간통), 왕 서방의 채마밭으로 배추와 감자 도둑질을 하러 가고(도적), 색시를 맞이한 왕 서방을 죽이려고 찾아가 싸움을 벌이다가 왕 서방에게 죽임을 당한다(싸움과 살인). 낫을 들고 왕 서방에게 덤비던 복녀가 도리어 살해당하는 것은 과도한 처벌로서의 징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감자’에서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칠성문은 평양성의 대표적인 성문 중 하나이다. 고구려 시대에 처음 건설된 평양성은 외성, 중성, 내성, 북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됐으며, 성 내부에 있는 성벽까지 합하면 성벽의 총연장은 약 23㎞에 이른다. 북두칠성에서 유래한 칠성문은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서 현재 북한국보유적 제18호이다.(박대남, ‘고구려 평양성과 누정’, 『월간북한』, 2016.11, 126∼129쪽) 평양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칠성문은 이광수의 ‘무정’에서도 선명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무정’에는 칠성문 밖 지역이 빈곤과 낙후의 전형적인 공간이 된 사정이 “철도가 생기기 전에 지나가는 손님도 있어서 술도 팔고 떡도 팔더니 지금은 장날이 아니면 사람 그림자도 보기가 어렵다”는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칠성문 밖은 철도로 상징되는 발전에서 소외되는 바람에 시대의 변화에 뒤처졌던 것이다. 이것은 1929년쯤에 300여 개에 이르던 공장이 대동강 중·하류 지역에 위치했고, 평양성 내에 거의 모든 근대시설이 위치했던 당대의 상황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김기혁, ‘도로 지명을 통해 본 평양시의 도시 구조 변화 연구’, 『문화역사지리』, 26권 3호, 2014, 37쪽, 41~42쪽) 평양성 안이 근대적 도시로 발돋움하는 동안, 칠성문 밖은 과거의 어둠에 결박됐던 것이다.

거리 곳곳에 체제를 옹호하는 구호가 적혀 있는 평양 시내.  자료사진
거리 곳곳에 체제를 옹호하는 구호가 적혀 있는 평양 시내. 자료사진

‘무정’에서 칠성문 밖을 대표하는 존재는 ‘낡디낡은 탕건을 쓴 노인’이다. ‘낙오자’이자 ‘과거의 사람’으로 규정되는 노인은 철도를 모르고 전신과 전화를 모르는 사람으로, 평양 성내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형식, 영채, 선형, 병욱 등의 선구자들이 찬란한 성공담을 보여주는 에필로그에서도 칠성문 밖의 ‘낡디낡은 탕건 쓴 노인’은 “다만 그 감투가 전보다 더 낡아졌을 뿐” 툇마루에 나와 앉아서 몸을 흔들거리고 있을 뿐이다. ‘감자’는 바로 그 노인의 후일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대와는 담을 쌓은 채 낙후돼가는 칠성문 밖 빈민들이 도달한 하나의 극점이 바로 복녀의 처참한 삶인 것이다.

‘칠성문 밖 빈민굴’과 더불어 ‘감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으로는 기자묘가 등장한다. 기자묘는 중국 은(殷)나라의 성인인 기자(箕子)의 동래설(東來說)에 따라 후대에 추정해 만든 그의 묘당(廟堂)이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기자를 문화와 문명의 기원으로서,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로 만들어낸 성인으로 떠받들곤 했다. 기자묘는 조선 시대의 지배적인 유교적 가치가 응축돼 있는 상징적인 국가 기념물이었던 것이다. 기자묘에서 처음으로 매음을 하는 복녀의 모습은 정절과 같은 유교적 가치를 신랄하게 조롱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 매춘을 하고 나서 복녀는 “처음으로 한 개 사람이 된 것 같은 자신까지 얻었다”는 점이다. 복녀는 돈 80원에 팔려온 물건으로서 그동안 고유한 욕망도 의지도 생각도 드러내지 않았다. 매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복녀는 ‘긴장된 유쾌’라는 감정을 느끼고, 나아가 ‘한 개 사람’으로서의 자기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발견이 매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야말로 복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복녀는 점차 얼굴도 예뻐지고 돈도 많아지고 남편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복녀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복 많은 여인이 돼가는 것이다. 복녀의 출세기가 정점을 찍는 것은 중국인 왕 서방을 만났을 때이다. 왕 서방과 관계를 시작한 후, 복녀는 ‘동네 거러지들한테 애교를 파는 것’도 중지하고 ‘빈민굴의 한 부자’가 된다.

‘감자’에서 왕 서방은 감자(고구마를 의미함)와 배추로 덫을 놓고 여자를 기다리는 호색한이며, 나중에는 의리도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호색한이자 매정한 인물로 굳이 중국인을 등장시킨 것도 ‘감자’가 평양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것과 관련된다. 일제강점기 평양은 가장 많은 중국인이 살았던 도시이며, 만보산 사건으로 촉발된 중국인 배척 사건의 광풍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중국인에 대한 적대 감정이 팽배한 도시였다. 김동인도 이러한 감정에서 예외일 수 없었으며, ‘붉은 산’(『삼천리』, 1932.4)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중국인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실제로 칠성문 밖에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넓은 중국인의 채마밭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복녀는 매춘을 통해 인간이 되고자 했다가 결국 싸늘한 시체가 된다. 처음 80원에 팔린 물건이었던 복녀는 다시 50원짜리 물건으로 환원돼 버린 것이다. 복녀라는 이름이 엄청난 반어인 것처럼, 복녀의 ‘성공’과 ‘유쾌’의 출세기는 사실 ‘실패’와 ‘불쾌’의 몰락기였던 것이다. 김동인은 이후 ‘군맹무상(群盲撫象)’(『박문』, 1939.2)이라는 글에서 ‘감자’가 “무지하기 때문에 생겨난 비극”을 다룬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이때의 무지는 매춘의 부정성을 간파하지 못한 복녀의 무지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무지를 결코 복녀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때의 무지는 칠성문이 만들어낸 무지이자 시대가 만들어낸 무지이기 때문이다. 복녀의 결정적인 타락(무지)의 장면(기자묘의 송충이잡이 현장과 처음 왕 서방에게 몸을 판 현장)에는 꼭 빈민굴의 여인들이 복수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복녀의 타락(무지)이 복녀 개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또한 이러한 여인들의 무지 근저에는 무책임하고 타락한 남자들의 무지가, 더욱 근본적으로는 시대의 무지가 도사리고 있다.

칠성문, 기자묘와 더불어 ‘감자’에는 평양의 고유 지명으로 연광정이 등장한다. ‘극도로 게으른 사람’인 복녀의 남편은 막벌이 일꾼이었을 때, 온종일 지게를 지고 연광정에 가서 대동강만 내려다보는 것이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세어진 연광정(북한국보유적 제16호)은 대동강 가에 위치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꼽히는 명승지이다. 김동인은 한 산문에서 연광정을 “그대의 앞에는 문득 연광정이 솟아 있으리니. 옛적부터 많은 시인 가객이 수없는 시와 노래를 얻은 곳이 이 정자다. 그리고 그 연광정 아래는 이 세상의 온갖 계급, 관념을 무시하듯이 점잖은 사람이며 상스런 사람이며 늙은이며 젊은이가 서로 어깨를 겯고 앉아서 말없이 저편 아래로 흐르는 대동강 물만 내려다보고 있으리라.”(‘대동강’, 『매일신보』, 1930.9.6)라고 서술했다. 이때의 연광정은 실질이나 생산과는 거리가 먼 허무와 탕진의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칠성문 밖의 빈민굴과 기자묘는 25년 후에 또 한 명의 평양 출신 작가인 김사량에 의해 다시 형상화된다. ‘기자림(箕子林)’(『문예수도』, 1940.6)은 기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기자묘 숲속에서 점치는 일을 하는 기초시(箕初試)를 통해 조선적 가치가 일제 말기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처했는지를 신랄하게 보여준다. 그는 칠성문 밖 빈민굴에 살면서 기자림 입구에서 사람들에게 점을 봐주는 것으로 소일하는 사람이다. 기초시는 매춘을 하는 딸 탄실에게 “열녀는 불경이부절(不更二夫節)” 등의 고상한 말을 읊조리지만, 사실은 탄실이 덕에 간신히 끼니를 이어간다. 온갖 무시와 굴욕 속에서 살아가는 기초시는 탄실이가 기자의 후손인 선우 참봉의 첩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기만을 기다린다. 탄실이가 아들을 낳으면 자신도 한밑천 잡을 것이고, 그 돈으로 자신도 젊은 여자를 얻어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야망을 불태우기까지 한다. 그러나 탄실은 죽고, 기초시는 낡은 역서(易書)와 우산마저 잃어버린 거지가 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한국 문학사에서 ‘칠성문 밖 빈민굴’이 만들어낸 인간형은 ‘낡디낡은 탕건을 쓴 노인’(‘무정’)과 ‘복녀’(‘감자’)를 거쳐 ‘기초시’(‘기자림’)라는 광인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평양은 주체사상탑이나 혁명사적관과 같은 정치적 조형물이 가득한 이데올로기적 공간이 됐다. 동 이름뿐만 아니라 도로명 등도 최고지도자가 직접 명명하거나 주체사상의 내용을 담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평양의 모란봉구역(구역은 한국의 구에 해당)에는 영웅거리, 개선거리, 안상택거리 등과 더불어 칠성문 거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칠성문이 차지하는 공간적 위상이 이념이나 정치권력의 힘으로도 쉽게 지울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토록 가까운 거리지만 갖가지 문헌을 통해서만 칠성문과 기자묘와 연광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지금의 민족적 현실은, 우리 시대의 무지가 낳은 또 다른 비극인지도 모른다.

이경재 문학평론가

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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