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전도사’ 유경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
2000년 모임 만든 후 17년째
매달 공부방… 내달이면 200회
재취업 강요에 SNS 배우라니…
‘낀 세대’베이비부머의 애환
고단한 삶 쉬라고 책 권했더니
그림책속‘生老病死’다시 생각
‘웰다잉’에 대한 적극적 준비도
손주 쓰다듬으며 하는 옛날얘기
이젠 직접 그림책으로 그리며
어르신들‘그림책 유산’남기죠
지난 10일,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리던 날 서울 마포구의 연구실 겸 공부방으로 쓰고 있는 한 아파트에서 만난 유경(57) 어르신사랑연구모임(어사연) 대표의 공간은 울긋불긋했다. 책장을 빼곡히 채운 동화책의 색감이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티백으로 우린 더운 차를 내며 “가을 낙엽을 즐겨보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두던 유 대표는 참 편안해 보였다. “그림책을 보면 이렇게 마음이 편해집니다”라며 웃는 그는 지난 2000년 12월 노인복지 학습모임 ‘어사연’을 만든 후 17년째 이어오고 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노인복지 현장의 경험과 지식, 기술을 나누는 모임이다. 월 1회 매달 마지막 목요일 오프라인에서 만나 ‘어사연 공부방’이 열린다. 소문을 듣고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해 어느덧 회원 수만 약 3000명이다. “이번 달이 199회 공부방이었으니, 다음 달이면 200회 공부방이 열립니다. ‘어사연 공부방’의 특징은 회원들이 곧 주인공이라는 것이죠. 외부 초빙 강사가 아니라 카페 회원들이 돌아가며 발표합니다. 나이 들고, 은퇴하고 자존감을 잃어가던 이들이 스스로 수업을 준비하고 타인 앞에 서며 지금껏 몰랐던 기쁨을 맛보는 거죠.”
어사연 회원 구성원을 보면 그 면면이 다양하다. 노인복지 현장 전문가를 비롯해 노년과 나이듦, 죽음 준비 등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했다. 그들은 그동안 나눴던 삶의 지혜와 지식을 바탕으로 두 차례 책을 펴내기도 했다.
“회원은 대학생부터 70대까지 다양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함께 교류하는 장이 만들어지죠. 이를 바탕으로 ‘노년에 인생의 길을 묻다’ ‘사랑합니다, 당신의 세월을’을 발간했어요. 요즘은 교재로 쓰는 그림책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지고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관련 수업도 진행하고 있죠.”
어사연에서는 그림책이 중요한 교재다. 유년기에 봤고, 부모가 된 후에는 어린 자녀에게 읽어주기 위해 펴본 후 또 수십 년 거들떠보지 않던 그 동화다. 그런데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며 왜 유 대표는 다시금 그림책을 꺼내보라는 것일까?
“일단 쉽잖아요. 글자가 조금이고 그림이 많으니까요. 우리는 그림책을 보고 평을 하는 모임이 아니에요. 보고 느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죠. 아이를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그림책이 과연 나이듦과 죽음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속에는 우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삶의 지혜와 위로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제가 ‘50+’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그림책에 몰두한 이유죠.”
물론 거부감을 가지는 이도 있었다. 은퇴한 노년층 중 적잖은 이들이 높은 지위를 누리다 내려온다. 스스로 가장 지식이 많고, 똑똑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시점이다. 그런 이들에게 그림책을 쥐여주면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막상 읽어본 후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2000년 모임 만든 후 17년째 매달 공부방… 내달이면 200회 재취업 강요에 SNS 배우라니… ‘낀 세대’베이비부머의 애환 고단한 삶 쉬라고 책 권했더니 그림책속‘生老病死’다시 생각 ‘웰다잉’에 대한 적극적 준비도 손주 쓰다듬으며 하는 옛날얘기 이젠 직접 그림책으로 그리며 어르신들‘그림책 유산’남기죠“‘이거 아이들이 읽는 책 맞아요?’라고 묻는 분들이 많아요. 맞죠. (웃으며) 책에도 ‘5세용’이라고 써 있으니까요. 어린이들이 읽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죠. 그런데 같은 책을 보고 7세와 70세가 느끼는 게 완전히 다를 수도 있고, 완전히 일치할 수도 있어요. 정답은 없어요. ‘고향의 봄’이라는 그림책은 (홍난파가 작곡한) 노래의 가사와 그에 맞는 그림이 담겼죠. 어떤 어르신들은 그 책을 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려요. ‘정말 내가 살던 곳이란 똑같은 곳이네요’라고 말씀하시면서요. 수많은 글보다 훨씬 크게 와 닿는 그림 한 점이죠.”
유 대표는 어떤 계기로 그림책을 기반으로 한 노인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그는 1983년 CBS에 입사해 아나운서로 일했다.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하면서 노인복지에 눈떴다. “이쪽 일 하면 잘하겠다”는 선배 복지사들의 칭찬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모두의 만류를 뒤로 하고 아나운서라는 선망의 직업을 7년 반 만에 접고 노인복지에 뛰어들었다. 당시 사내 연애로 시작해 아직 CBS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인생의 전환점이 오면 꼭 노인복지를 위해 일해보리라 마음먹었죠. 30대 초반에 자격증도 없이 서울 보라매공원과 효창공원에 각각 하나씩 있는 복지회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어요. 그러다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관련 공부를 시작했고, 이후 ‘사회복지사 유경’의 삶이 진짜 시작된 거죠. 어떤 교육법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그림책을 활용하면 이야기를 풀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순이 된 친정엄마가 제 첫 수업의 대상자였죠. 그때 ‘그림책이네~’라며 관심을 보이며 환히 웃던 엄마의 모습이 지워지질 않네요.”
유 대표와 그림책을 공부하던 머리 하얀 학생들 중에서는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것이다. 조부모가 무릎에 손주를 앉히고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책을 통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더없는 기쁨이다.
“만들기 수업도 따로 진행해요. ‘내 인생의 그림책’을 만드는 거죠. 소중히 간직했던 사진을 몇 장 붙이고 간단히 채색을 하는 정도여서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그분들에게는 무엇보다 훌륭한 자서전이죠. 이 그림책 자서전 만들기는 죽음 준비 교육 과정에도 유용하게 쓰여요.”
유 대표가 전파하는 은퇴 이후의 삶은 3단계로 나뉜다. ‘노년 준비’와 ‘죽음 준비’, 그리고 ‘노년 생활’이다. 노년 준비는 아직 노년이 되기 전에 적용되고, 죽음 준비는 노년에 이른 분들이 삶을 잘 마무리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노년 생활은 공들여 준비한 삶을 잘 영위해가는 방법을 뜻한다. 유 대표가 노년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본인이 ‘50+’ 삶을 대비해야 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전 전형적인 베이비부머 세대예요. 병에 시달리는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고 독립하지 않은 자녀를 걱정하죠. 그런데 사회는 아직 늦지 않았다며 ‘재취업하라’ ‘SNS를 배우라’고 강요해요. 참 고단한 삶이죠. ‘낀 세대’의 애환이에요. 저 같은 고민을 가진 분에게 그림책을 권하며 ‘좀 쉬어가세요’라고 하는 게 제 임무예요. 여전히 ‘성취’와 ‘결과물’에 대한 압박을 받기보다는 좀 내려놓으라는 거죠.”
요즘 유 대표의 주요 관심사는 ‘웰다잉(well-dying)’이다. 내년 시행되는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에 관한 법률)으로 인해 죽음을 대하는 자세 또한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죽음 준비 교육 강사로 활동하며 대중화를 이끌었던 유 대표로서는 이 법의 시행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웃으며) 법 이름만 30글자예요. 모두가 필요성을 공감하니 법제화된 거죠. 그래도 아직 거부감을 가진 분들이 많아요. 존엄한 죽음은 결국 소통이에요. 누군가의 죽음은 결국 그 가족들이 맞게 되니까요. 어르신들에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대해 알려 드리면 자녀들이 ‘왜 그런 것을 알려 드리냐?’고 항의 전화를 하기도 해요.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더욱 적극적인 교육이 필요하죠. 전 그림책이 그 좋은 도구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삶에 지친 어르신들이 그림책으로 마음을 달래고, 그리고 자신만의 그림책을 남기고 떠나는 거죠. 떠나는 이들이 남겨진 이들에게 주는 좋은 선물이 될 거예요.”
유 대표는 나이듦의 기쁨을 알려주는 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넌 어떻게 나이들고 싶니?” 그렇게 그 역시 나이드는 것을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유 대표가 자신의 강의의 화자이자 청자인 이유다.
“일단 외모는, 착하고 깨끗한 얼굴로 나이 들고 싶고요. 아나운서 경력을 살려 노인 방송 진행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건 좀 무리인 듯하니 할머니 리포터가 되고 싶고요. 그리고 친정 부모님께서 제 두 아이를 길러주신 사랑과 정성을 기억하면서 손주들 태어나면 잘 길러주고 싶습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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