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농상생보다 농도상생이 맞는 말 아닌가요. 농촌이 먼저 생겼잖아요.”(김병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 “도농상생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치유’라고 봅니다.”(이소희 농산물브랜드 ‘소담’ 대표) “농업의 성공사례뿐만 아니라 도농상생을 통한 도시민들의 성공사례, 기업의 성공사례도 다뤘으면 좋겠습니다.”(장재봉 건국대 식품유통공학과 교수) “농촌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김대현 영월농협 가공사업소 소장) “문화일보가 도농상생 홍보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새문안로 농협중앙회에서는 (사)농촌사랑범국민운동본부·문화일보 주관으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도농상생 2017 심포지엄’이 열렸다. 도농상생을 주제로 한 국내 언론사 주관 심포지엄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자리에서는 문화일보가 ‘1사1촌 운동’에 이어 올해 새롭게 시작한 ‘도농상생’ 홍보활동과 관련한 주제발표와 사례발표, 그리고 각계 전문가와 청중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앞으로 도농상생 운동이 나아갈 방향과 현장의 목소리, 그리고 시민들의 의견까지 ‘도농상생’ 활성화를 위한 격려와 고언을 상·하로 나눠 2회에 걸쳐 지상 중계한다.
김윤림 기자 bestman@munhwa.com
김병률 농촌경제硏 부원장이 제시한 도농상생 방안
“일방적 주고받는 관계 아닌
공감대 통해서‘윈-윈’해야
헌법에 농업 가치 반영 필요
도시 자본 농촌에 들어와야
일자리·수익창출‘일석이조’”
저는 김대중 정부 때 2년간 도농교류 사업에 대해 연구를 조금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시의 소비자단체와 농촌이 연결되는 사례를 많이 봤습니다. 프랑스의 지트(농가민박)도 가보고, 농가 레스토랑이라든가 이탈리아, 일본 등을 다녔는데 그것이 계속 더 확대돼 이렇게 도농상생이라는 데까지 오게 됐고, 그와 관련해 정말 중요한 일을 한 곳이 바로 문화일보라고 봅니다. 1사1촌 운동이라는 것이 문화일보에서 계속 연재가 됐었는데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도농교류 얘기가 많이 일반화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나아가 도농상생도 좀 생소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도농상생’이 아니라 ‘농도상생’이 맞지 않나요? 도시가 나중에 만들어졌고, 또 농촌을 기반으로 해서 도시라는 것이 있고,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또 농촌에 가서 살고 그런 선순환이 되니까 그런 면에서 도농상생보다는 오히려 농도상생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농교류 얘기를 많이들 합니다. 그것이 1980년대 초반에 농촌관광 사업이라고 해서 그때 관광농원 사업을 했거든요. 아마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들어와서 중반에 도농교류 사업으로 이름을 바꿨지요. 그런데 이 도농교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그 당시에는 단순한 교류, 그러니까 농촌에 가서 체험하고 농산물 구매해 주는 것, 그 정도의 개념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도농상생이라는 것은 잘 아시겠지만 서로 같이 윈-윈한다는 거잖아요.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한쪽을 후원해 주고 그냥 사주기만 하는 이런 개념이 아니고 서로 호혜적으로 혜택을 주고받는 것이지요. 이것을 위해서는 공감대가 필요한데 아직은 공감대가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그런 차원에서 제가 보기에는 도농상생을 더 확산하고 발전하려면 헌법에도 농업의 다원적 기능이라든가 공공적인 가치가 분명히 포함돼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미래 삶의 공간이라는 인식으로 도시민들의 관점에서 도농상생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보면 사이먼 쿠즈네츠 교수가 일찍이 지적했듯,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농업도 함께 발전해야 됩니다. 농업 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도농교류가 되면서 도시에서는 여가활동, 문화체험이라든가 농사체험, 안전한 우리 농산물(먹거리)을 받는 것이고, 또 상대적으로 농촌에서는 도시민들이 함께 이용해 줌으로써 지역활력이 되는 겁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자본의 교류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굉장히 중요할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우리가 4차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에 있는 자본이 농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례 자연드림파크 같은 것입니다. 도시에 있는 자본이 농촌에 가서 일자리도 창출하고 그 자체가 수익성을 창출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물적 교류가 될 것이고요. 그리고 서비스 교류도 있습니다. 다양한 체험이라든가 휴양 등 힐링하는 농촌의 서비스, 기타 복지 수요에 대응되는 서비스가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요즘 실버타운 같은 것이 대부분 농촌과 가까운 데에 다 들어가 있잖아요. 그런 복지 서비스는 도시 안에서만은 불가능하고 농촌이라는 곳이 기반이 돼서 가능한 것이지요. 또 하나가 문화교류인데 팜스테이라든가 다양한 축제 등이 해당할 것 같습니다.
저는 도농상생 활성화를 위해서는 농촌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도시민들이 올 때를 그냥 기다리는 농촌이 아니고 농촌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도시민들의 변화도 유도해야 하는데, 도시의 젊은이들도 농촌에 와서 일자리를 같이 하면서 보람을 느끼게끔 도시민들의 변화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업의 참여와 협력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미래의 농산업이 농민만으로는 되지 않거든요. 도시에 있는 기업들의 자본이 들어와 농민들과 함께하고, 또 그렇게 해야 도농상생이라는 개념이 더 살아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중요했는데, 책임보다는 공유가치 창출 쪽을 같이 해야만 더 큰 상생이 될 거라고 봅니다. 이런 개념으로 기업의 참여와 협력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년째 오미자 기르며 예비농업인 교육
체질 맞춤‘치유음식 프로그램’도 진행”
이소희 ‘소담’대표가 말하는 6차산업 성공사례
“유치원 교사하다 농촌으로
1년만에 6차산업 인증받아
농사 지으며 현장실습 병행
아이들과 함께 자연 누리는
‘자연학교’만드는게 장래꿈”
요즘 저를 보시는 분들께서 “너는 도대체 직업이 몇 개냐?”고 많이 물어보세요. 저는 21년 전 귀농하신 부모님을 따라서 4년 전에 귀농을 했고요. 현재 청년여성농업인CEO중앙연합회 전국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1996년도, 제가 아홉 살 때 돌연 귀농을 선언하셨고 친인척도 없고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경북 문경, 그중에서도 굉장히 오지인 농암면 궁터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춘기 시절을 겪으면서 절대 시골에서는 안 살 거라고 다짐했었고 저를 시골에 방치해 두신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컸었습니다. 그래서 전공도 농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시골이 싫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유아교육과를 졸업했고요, 서울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준다는 유치원에 취업했는데 대신에 아침 5시에 출근을 하고 새벽 1시에 퇴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터닝포인트가 됐던 시점이 있었는데요, 저희 반에 아토피가 굉장히 심해서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짓무르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한 친구들이 2명 정도 있었어요. 그 친구들한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교육을 할까 고민을 하던 와중에 원장님께서 추천을 해주셔서 독일의 ‘발도로프’라든지 ‘레지오 에밀리아’ 같은 생태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좋은 먹거리를 제가 직접 생산하고, 또 그 먹거리를 아이들이 저희 농장으로 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즐기는 체험을 하게 되면 아이들도 얼마나 즐겁고 나도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2014년도에 귀농을 할 당시 27세였는데 문경시에서 청장년을 위한 6차 산업 프로그램 공모전이 있었어요. 그래서 기대를 하고 갔더니 청년이 없더라고요. 제 위의 청년이 서른여덟이었고요. 그 위의 청년이 마흔두 살이었어요. 정말 청년이 없더라고요. 제가 오미자 등 8가지 품목을 재배하는 이유는 농촌에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력이 너무 부족해요.
2015년도에 6차 산업 인증을 받았습니다. 현장실습 교육장이라고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지정받은 것인데 전국에서 오미자 재배법을 가르칠 수 있는 현장교육 실습장은 저희 청화원 하나로 지정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많은 농고·농대생 그리고 귀농을 준비하시는 예비 농업인들이 와서 교육을 받고 계시고요. 21년 동안 아버지께서 제초제 치시는 모습은 제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요. 항상 예초기를 메고 다니십니다. 그래서 제가 따라해 봤더니 그 다음날 되니까 숟가락을 던지게 되더라고요. 손이 하도 떨려서요.
저는 도농상생에서 점진적으로 나아갈 방향이 ‘치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는 좋은 농산물을 재배해서 그 농산물을 이용해 먹거리를 만들고, 그 먹거리를 찾아오신 분들께 체질별로, 또는 가지고 계신 질병에 따라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먹거리를 드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치유음식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크게 세 가지 꿈을 가지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저희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할 수 있는 소담이라는 브랜드가 문경시 대표 브랜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올해 목표를 5000만 원만 벌어보자고 했는데 그 이상을 벌게 됐어요. 그리고 가장 처음에 저의 꿈이었던 자연학교를 만들고 싶고요. 이 환경 그대로 지켜가면서 농촌은 농촌답게, 도시는 도시답게, 그래서 도시에 계시는 분들이 저희 농촌에 오실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만들고 싶고요.
제가 항상 멘토라고 말씀드리는 분이 전남 광양의 매실명인 홍쌍리 여사님이세요. 홍쌍리 여사님께서 저한테 전화를 한번 주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지금은 네 손이 곱디고운 여자 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느 날 네가 정말 흙과 함께 살았을 때 네 손이 가시내 손인지 머스마 손인지 모를 정도로 흙과 함께 네가 산다면 농업에도, 너의 인생에도 매화동산 같은 꽃밭이 생길 거다”라고요.
그래서 지금 저의 직업은 농부이자 동네 어르신들의 택배기사, 농촌 디자이너, 농촌체험 교육농장 교사를 겸해 저희 농촌민박 펜션의 화장실 청소를 하는 잡부까지, 제 직업을 한번 세어보니까 8가지 정도 되더라고요. 저는 앞으로도 이렇게 농촌과 함께 자연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런 처녀농부 소희 씨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많이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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