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예산에 대해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라고 강조하며 국회에서의 심도 있는 논의를 당부한 바 있다. 11월 1일 2018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제출을 위한 국회 시정연설에서다.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가 한 달여 동안 보여준 모습은 불행하게도 이와 거리가 한참 멀었다.
6일 새벽 우여곡절 끝에 2018년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의미 있는 논쟁은 없었다. 밀실에서 주고받는 정치권의 뒷거래로 ‘가치’ 논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국가경제활동과 복지·노동, 국민 실생활에 미칠 정책의 가치는 고작 선거구제도가 갖는 가치로 치환됐다. 일자리·복지는 이번에도 정치에 희생됐다. 그 자리는 사회 전체 차원에서 필요한 간접자본(SOC)이 아니라, 의원들 지역구 사업이 대신했다. 재정 건전성, 부자 증세 논란, 법인세와 기업활동, 보편 복지 또는 선별 복지 문제는 여야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 있더라도 충분하고 깊이 있는 생산적 논쟁이 필요한 국가 이슈들이었다. 세밀하게 짚어볼 것은 짚어보고, 긍정·부정의 영향을 계수화할 정도로 미래를 위한 토론이 진행됐어야 마땅했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와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 사이에 오간 해법이 정도라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다. 중대선거구제 개편,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가 민생예산의 ‘가치’ 자리를 대신했다. 자유한국당은 협상을 깨야 한다는 무기력한 목소리만 내고 자포자기했다.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 방향을 관철하긴커녕 설득력 있는 논박 한번 제대로 못 했다.
이러는 사이 맞벌이 부부의 노동 가치, 최저임금 인상분으로 현장의 기업이 짊어져야 할 경제적 부담, 건강보험료의 정부 부담금 축소로 인해 국민에게 전가될 몫의 가치는 선거구제 개편과 등가가 돼 버렸다. 특히 아동수당의 경우 소득 상위 10%를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맞벌이 부부의 피해, 자영업자층과의 형평성 논란이 예상된다. 선거구제 역시 반드시 풀어야 할 중대한 국가 현안임에는 분명하지만 왜 하필 민생과 정치제도 개선을 정치권이 야합과 뒷거래로 맞바꿔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검증되지 않은 경제실험을 시작하는 마당에 정치적으로 나눠 먹기를 위한 평균 내기 산수만 있었지, 국가경제 차원의 치밀한 경제수학 논쟁은 들리지 않았다. 누구에게 얼마를, 어떤 이유로 주고 뺏는다, 대상을 몇 퍼센트 늘리거나 줄일 경우 기업활동과 가계 소득에 얼마큼의 영향을 준다 등 예산 자체의 논리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주장했는지 낱낱이 국민에게 알려야 당사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텐데 모두 생략됐다. 첨예하게 대립된 예산 이슈는 저마다 꼬리표를 달고 내년으로 해결 시점이 미뤄졌다. 3조 원에 육박하는 일자리 안정자금은 내년 근로장려세제 확대 등 간접지원 전환 계획의 국회 보고라는 부대 의견이 달렸다. 공무원 증원은 1년 뒤 재평가 항목으로 들어가 있다. 내년에도 이들 이슈를 놓고 정치권이 퇴행적인 다람쥐 쳇바퀴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허비할 게 불 보듯 뻔하다. 부작용이라도 최소화할 대책을 서둘러 마련했으면 하는 기대가 최선이라는 게 안타깝다.
jupiter@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