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 재현 모습. 저자는 금속활자의 발명을 포함해 인류의 문명은 우연의 결과라고 했다.   자료사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 재현 모습. 저자는 금속활자의 발명을 포함해 인류의 문명은 우연의 결과라고 했다. 자료사진
문명은 부산물이다. / 정예푸 지음, 오한나 옮김/ 378

사람들은 흔히 역사에 어떤 방향이 있다고 여긴다. 인류가 ‘의도된’ 길을 걸어서 ‘계획한’ 대로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녀가 있고서야 비로소 부모가 될 수 있듯이, 과거가 현재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의 진짜 원인이다. 과거는 현재가 ‘다시 쓰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일 중 어떤 것을 선택한 후 ‘필연의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사실은 우연의 산물에 불과한 자신의 기원으로 삼는다. 이것이 아마도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의 참뜻일 것이다.

 ‘문명은 부산물이다’에 따르면, 족외혼·농경·문자·종이·조판인쇄·활판인쇄 등 인류 문명의 위대한 유산들은 인간의 의도적 행동이나 계획적 행위의 산물이 아니다. 이들은 다른 일을 하는 도중에 ‘우발적으로’ 출현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이징(北京)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 정예푸(鄭也夫)는 고고학·문헌학·역사학·철학·인류학·사회학 등 수많은 학문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이 사실을 꼼꼼하게 증명해 간다. 한 권으로 만 권의 책을 읽은 기분이다.

 종이의 출현 과정을 살펴보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이지만, 채륜은 종이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굳이 따지면 그는 제지 작업 과정의 훌륭한 개량자라고 불러야 옳다. ‘후한서’에는 제지법을 고안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문헌이 전부는 아니다. 1933년 신장(新疆) 뤄부포(羅布泊) 봉화 유적지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이래 채륜 이전의 고대 종이는 무려 아홉 번이나 고고학적 발굴 과정에서 세상의 빛을 보았다. 종이는 채륜의 ‘의도’나 ‘계획’에 따라 발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채륜 이전의 종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저자는 나무껍질로 만든 천(수피포)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라고 말한다. 나무껍질로 옷감을 만들려면 나무껍질을 다량으로 물속에 넣고 섬유질이 나올 때까지 두드려 일종의 젤과 같은 상태로 만든 후, 이를 틀에 부어 서서히 건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때 틀 위쪽에 두껍게 뭉친 것은 옷감이 되고, 아래쪽으로 떨어져 얇게 굳어진 것이 종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이는 수피포 제작 과정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종이는 상당히 거칠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용도로 사용하기 어려웠고, 주로 보석이나 약 같은 것을 포장하는 데 사용됐다. 채륜은 이 기술을 개량한 것뿐이다.

 종이가 인류 문명의 중핵이 된 것은 인쇄를 통해서다. 인쇄의 탄생에는 ‘문명의 하이브리드’라고 불릴 만한 과정이 있었다. 이 요소 중 어느 하나만 없더라도 인쇄는 불가능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져 중국으로 건너와 있던 도장과 중국 고유의 종이와 탁본이 결합하면서 조판이 시작됐고, 그로써 송나라 인쇄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과거제도가 정립되면서 폭증하는 경전 수요가 이를 부채질했다. 이 역시 우발적이었다. 서아시아에서 발명된 이래, 6000년 동안 도장은 진흙에 찍는 봉인의 형태로만 이용됐고, 종이가 등장한 후에도 무려 500년 동안 종이에 직접 도장을 찍는 것은 드문 행위였다. 하지만 도장과 종이가 일단 마주치자마자 하나로 여럿을 만들어내는 기적의 발명이 됐고, 값비싼 석각을 대신하는 목판 기술까지 결합하면서 인쇄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금속활자의 발명 역시 우발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과 독일에서 금속활자가 사용된 이유가 다르다. 이는 활판인쇄가 각 지역의 사정에 맞춘 우발적 사건임을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 금속활자를 사용한 활판인쇄가 활발했던 것은 목판을 이용한 인쇄보다 훨씬 저렴해서였다. 중국에 비해 목판을 새길 장인의 숫자가 적었고, 목판에 쓰이는 대추나무나 배나무가 부족했으며, 인쇄의 목적이 서적의 대량 보급이 아니라 군신 사이의 도리를 배양하는 데 있어서 인쇄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처음부터 대량 인쇄를 위한 상업출판이었다. 사회적으로 도서의 수요가 이미 폭발 직전에 이르렀고, 알파벳 속성에 맞게 납활자를 발명하려 했던 천재적 아이디어가 있었던 데다, 때마침 제련 기술이 발달한 마인츠에 살아서 값싸게 활자를 주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텐베르크 혁명은 가능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졌다면, 인류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문명은 계획할 수도 없으며 인류의 목적적 행위로 결정되지도 않는다. 인류 역사의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켜 온 것은 대개 부산물이었다.” 저자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미래를 ‘계획대로만’ 만들어가려는 행위의 폐해를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저자는 경고한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인간의 힘이 커져 있는 상태다. 그러나 그 힘을 믿고 세상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인류 문명은 창조적 상상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문명에는 항상 인간의 의도와 상관없이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비약이 있었다. 인간의 힘이 커질수록 우발성이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겸손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것이 문명의 교훈이다. 528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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