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에서는 종종 글자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자가 된다. 글자의 크기가 커지면 주인공의 감정이 증폭되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하고 글자가 춤을 추는 것처럼 곡선을 그리며 배열되어 있을 때는 책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노랫가락과 리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글자를 그림처럼 활용하는 사례는 많지만 글자를 조각조각 모으고 붙여서 형상으로 나타내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아무래도 가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데다 글자의 조합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사용된 글자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내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힘들게 만들어낸 그 이미지 속의 글자들은 단순한 활자 모자이크가 아니기에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지녀야 하고 그림과 무관하게 제시된 책 본래의 이야기와 따로 놀지 않고 어우러지도록 구성돼야 한다.
‘책의 아이’는 이 난해한 작업에 도전해 믿기지 않는 성취를 이루어낸 작품이다. 타이포그래피 아티스트인 샘 윈스턴과 독특한 손글씨로 작업하는 올리버 제퍼스는 이 그림책에서 글자로 파도를, 절벽을, 밧줄을, 길을 만든다. ‘책의 아이’로 등장하는 소녀는 항해사의 옷을 입고 책의 세계를 낯설어하는 소년의 손을 잡아 이끌며 이야기의 바다에 배를 띄우고 암벽을 타고 우주 끝까지 날아가 마음껏 함성을 지른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소년이 이 모험을 통해 성장하고 마침내 책의 집을 빠져나와 혼자 글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장면은 독자의 책읽기도 이제부터 더욱 박진감 넘치는 즐거움으로 가득할 것임을 예고한다.
그림책 전문가들 중에는 이 책이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까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림책 전문 번역가인 이상희 시인은 이미지가 된 글자들과 독립적으로 한 편의 시처럼 존재하는 본래의 줄거리를 구슬처럼 엮어내어 그림과 하나가 되도록 옮겼다. 본문에 그림을 위해 등장하는 문장들은 알알이 아름답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피터 팬’ ‘보물섬’ ‘브람스의 자장가’까지 수많은 고전 텍스트들이 그림으로 충실히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한글과 알파벳의 분량 차이를 느낄 수 없도록 배치하는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노력도 대단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번역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달라진 원서와 번역본의 타이포그래피를 비교하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2017년 볼로냐 라가치상으로 이 작품이 결정되었을 때 아무도 이견을 달지 못했다. 그림책에 대한 통념을 깨뜨리는 걸작이다.
김지은 어린이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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