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가수 김희완 씨가 지난 19일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옥탑 사무실에 마련된 연습실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열창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늦깎이 가수 김희완 씨가 지난 19일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옥탑 사무실에 마련된 연습실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열창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고속도로 설계에 청춘 바쳐
특별한 취미없이 중년 생활

8년전 기타학원 간판에 끌려
코드 잡은 뒤 노래까지 발표

내친김에 음악지도사도 취득
“가족과 대화 늘어 신나네요”


“잊은 듯 잊은 듯 또 살아가다가
문득 나 이유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지
눈물이나 창피하게 하늘 바라보다가
내가 왜 이랬는지 알면서도
기억되질 않는 너의 얼굴
그리워 사랑했던 사람이여
소중했던 사람이여”


지난 19일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옥탑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작은 연습실. 늦깎이 가수 김희완(65·㈜경호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 부사장) 씨가 기타를 연주하며 시원한 목소리로 최근에 발표한 곡 ‘사랑했던…’을 열창했다.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을 추억하는 애절한 가사가 인상적인 곡이었다. 김 씨가 노래를 부를 때 목소리는 대화를 나눌 때 목소리와 비교해 훨씬 젊고 힘찼다. 노래를 마친 김 씨는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무대에 올라봤지만, 내 노래를 발표한 후에야 비로소 진짜 가수가 됐음을 실감했다”며 웃었다.

단순히 문화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해석하며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는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가 새로운 문화 소비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는 은퇴 이후에도 소비생활과 여가생활을 즐기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50∼60대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노년을 조용히 준비하고 마무리해왔던 기존 ‘실버 세대’와는 달리 ‘액티브 시니어’는 적극적으로 문화와 소비생활을 즐긴다. 이들은 시시각각 쏟아지는 뉴스에 귀 기울이며 사회를 향한 관심을 거두지 않고, 청년 못지않게 SNS 활동에도 열심이다.

김 씨는 ‘액티브 시니어’의 대표 사례다. 김 씨는 “포털사이트에 카페를 만들어 공연 동영상과 사진을 올리고 회원들과 함께 등산도 다니는 등 젊은이들 못지않게 수시로 온라인 소통에도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자신이 젊었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1970년대 말부터 수십 년간 전국 곳곳의 토목공사현장을 누볐다. 한양대 토목과를 졸업한 김 씨는 건설엔지니어링 회사에 입사해 토목 설계를 시작했다. 전국에 동맥처럼 깔린 고속도로 대부분의 설계와 확장 공사에 김 씨의 손때가 묻어 있다. 김 씨는 중부내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상주영덕고속도로 등 설계를 비롯해 경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확장공사 등에도 참여했다. 대형 화물기인 ‘보잉747’이 통과할 수 있는 사천비행장 교량도 김 씨가 설계한 작품이다. 또한 김 씨는 서울지하철 3·4·8호선 본선 및 정거장 설계, 전국 곳곳의 지하차도와 고가차도의 설계도 담당했다. 김 씨는 불과 30대 중반에 도로,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에 필요한 기반시설물의 설계와 시공을 맡는 책임기술자인 토목구조기술사 자격을 취득하며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외국의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원서를 구해 들여다보는 등 노력을 했고, 운 좋게도 실력파 상사를 모시게 돼 우리나라의 여러 굵직한 공사현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제가 설계에 참여했던 도로와 교량을 만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옛 추억도 많이 떠오르고 국가 발전에 나름 공헌했다는 생각에 보람도 느끼죠. 정말 열정적으로 일하며 살았던 젊은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동년배들과 비슷하게 김 씨는 낚시와 골프에 취미를 붙였다.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그는 낚싯대를 잡거나 골프채를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취미였다. 그랬던 김 씨가 기타에 빠지게 된 계기는 8년 전 출근길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기타 학원 간판 때문이었다. 기타 학원 간판은 김 씨의 인생 후반전을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2009년쯤일 겁니다. 집에서 나와 사무실로 걸어가다가 고개를 들어 건물들을 바라봤는데 기타 학원 간판이 보이더군요. 문득 기타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습니다. 노래 부르는 일은 즐기는 편이었지만, 악기를 연주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는데… 희한한 일이죠.”

처음엔 취미로 시작한 기타 연주였지만, 시간이 흐르니 조금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젊었을 때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원서를 탐독하며 공부했던 자세가 취미였던 기타 연주를 취미 이상으로 발전시켰다. 김 씨는 홍대 앞에서 공연하는 젊은 연주자들을 찾아가 모르는 부분을 묻고, 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재학 중인 학생을 초빙해 가르침을 구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김 씨는 2년 전 실용음악지도사 1급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처음에 다녔던 학원에선 강사가 단순히 코드 잡는 방법 정도만 알려주지 왜 그렇게 코드를 잡아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론적인 부분을 잘 몰라도 기타를 즐기는 데엔 지장이 없지만, 이왕 시작한 일인데 제대로 해보고 싶더군요. 배움에 나이와 부끄러움이 어디 있습니까. 화성학 책을 구해 음악 이론을 공부하고, 젊은 연주자들을 찾아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는 등 열심히 기타에 매달렸죠. 오랜만에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니 삶에 활력도 생겼고요.”

실력이 쌓이자 자연스럽게 무대에 오를 기회도 생겼다. 처음에는 여럿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공연의 일원이었지만, 무대에 오르는 일이 늘면서 점점 자신만의 실력을 뽐낼 기회가 늘어났다. 지하철역 무대, 공원 수변 무대, 노인 요양원 등 설 수 있는 무대도 다양해졌다. 김 씨의 레퍼토리는 200여 곡에 달한다. 김 씨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계절별, 관객 연령별, 날씨별 등으로 구분해 매 공연마다 다채로운 곡으로 무대를 꾸민다. 다양한 레퍼토리 덕분에 김 씨는 즉석에서 관객으로부터 어떤 신청곡을 받아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제 노래가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지하철 무대에서 공연하면 고정적으로 찾아오고 음료수까지 챙겨주시는 팬들까지 생겼습니다. 특히 요양원에서 어르신들께 노래를 불러드릴 때 느끼는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요양원에는 많은 어르신이 있지만, 각 방이 서로 분리돼 있어 서로 마주치거나 만날 일이 드뭅니다. 제 공연이 어르신들이 서로 만나 친분을 쌓는 사교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 또한 몰두할 무언가를 찾으니 하루하루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자신감이 생기고요.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겼던 가족들도 제가 재미있게 산다며 좋아합니다. 덕분에 가족과 대화할 거리도 많이 생겼고요.”

그랬던 김 씨에게도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어떤 가수보다도 자주 무대에 오르는 그이지만, 자기 노래가 없어서 자신을 가수라고 소개하는 일이 쑥스러웠다. 이 같은 고민을 들은 김 씨의 대학 친구가 지인인 이우영 한국영상대 실용음악과 교수를 그에게 소개해줬다. 이 교수는 김 씨의 데뷔곡 ‘사랑했던…’을 작곡해줬고, 그는 자기 노래를 가진 진짜 가수가 됐다. 기타를 잡은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관객들로부터 제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최소한 제 노래 한 곡은 있어야 진짜 가수가 되겠구나 싶었는데, 마침 좋은 인연을 만나 제 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 노래를 세상에 발표하게 되니, 앞으로 노래를 제대로 잘 불러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아나운서들이 매일 발음 연습을 하듯 저도 매일 발성 연습을 하며 언제든지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요즘 신곡 발표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는 발표를 앞둔 신곡을 즉석에서 라이브로 선보였다.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를 연상케 하는 빠른 리듬을 가진 흥겨운 곡이었다. 이제 그는 직장이란 무대를 넘어 진짜 무대에서 더 빛이 나는 존재를 꿈꾸고 있다.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되면서 제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습니다.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됐다는 점입니다. 기타 연주는 정말 건강한 취미입니다. 노래는 여럿이 함께해야 즐겁습니다. 앞으로 계속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저도 즐거움을 얻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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