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인 하프 위크

일탈 스토리 진부하지만
탐미주의적 미장센 절정


영화 ‘나인 하프 위크’
영화 ‘나인 하프 위크’
처음 만난 남녀에게 두 달 정도의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첫눈에 끌린 이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9주 반이 주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면 좋을까. 누구나 떠올려 봤음 직한 지극히 범박한 질문에 대해 ‘플래시댄스’의 연출자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은 누구도 떠올려 보지 못한 음탕한 답을 내놨다. 1986년 작 ‘나인 하프 위크’(사진)를 통해서다. 이 영화는 미국 뉴욕 한 갤러리의 어시스턴트 엘리자베스(킴 베이신저)와 증권 브로커 존(미키 루크)이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9주 반 동안의 성적 일탈을 그렸다. 특별할 것 없는 범작이라는 평에도 당시 최고 스타들의 출연만으로 뜨거운 화제가 됐다. 1990년대 타블로이드를 휩쓸었던 미키 루크의 치명적 미소와 킴 베이신저의 육감 넘치는 허벅지를 기억한다면 이 작품이 왜 ‘에로틱 시네마’의 전설이 됐는지 쉽게 수긍할 것이다.

영화의 전반적 에로티시즘 수위를 배반하듯 엘리자베스와 존의 조우 장면은 서정적으로 펼쳐진다. 벼룩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스카프를 발견하지만 못내 내려놓고 마는 엘리자베스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던 존은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가 스카프를 건넨다. 아름다운 미소로 상대의 느낌에 화답한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의 육체 구석구석에 스미며 그들은 서로에게 반한다.

서로를 향한 미칠 듯한 사랑, 혹은 욕정은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구현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자베스의 아파트에 방문한 존은 “당신의 몸을 느끼고 싶다”고 말한다. 얼음 한 조각을 손에 쥔 존은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리고 그의 몸 곳곳을 탐험한다. 녹아 흐르는 얼음은 여자의 가슴에서, 배꼽 위에서 수정처럼 굴러다닌다. 진한 섹스 신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이 장면은 ‘나인 하프 위크’에서 가장 섹시한 순간 중 하나로 회자된다. 엘리자베스는 낯선 쾌락에 서서히 중독되고 여자의 상기된 볼과 탄성이 새어 나오는 입술을 바라보는 것이 존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일상이 된다.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가 창조해낸 또 하나의 전설은 ‘푸드 신’이다. 만남이 잦아지고 여느 때처럼 격정적인 섹스를 치른 남녀는 허기를 느끼며 냉장고로 달려간다. 하지만 쾌락에 중독된 커플이 음식이라고 정상적으로 먹을 리 만무하다. 존은 또다시 엘리자베스의 눈을 감게 하고 딸기와 시럽에 절인 체리, 젤리 등을 온몸으로 느끼며 전율하는 여자를 집요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존은 “혀를 내밀어 보라”고 장난치듯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혀끝에, 손가락에 그리고 맨살의 허벅지 위로 꿀을 쏟아붓는다. 꿀의 달콤함인지, 끈적함이 주는 묘한 느낌인지 엘리자베스는 쾌락의 절정을 맛본다. 영화평론가들에게 탐미주의의 절정으로 언급된 이 장면에서 에이드리언 라인의 광고감독 출신으로서의 재능이 반영됐다. 흡사 메뉴판 사진을 연상하게 하는 총천연색 음식들의 향연. 가령, 클로즈업에 가둬 놓은 핏빛 젤리의 미묘한 흔들림과 매끈한 질감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성적 에너지를 가득 머금은 남녀의 먹잇감인 동시에 오감을 진동케 하는 영화적 재료다.

라인 감독은 일상적인 물체들을 명민한 색채보다는 질펀한 촉감으로 기능하게 했다. 물성 가득한 섹스 신은 그의 장기가 예술이 되는 순간임을 증명한다. 또한 킴 베이신저가 조 코커의 명곡 ‘유 캔 리브 유어 햇 온’(You can leave your hat on)에 맞춰 존을 위한 스트립 댄스를 출 때 비치는 하얀 가터벨트는 물체가 기능이 아닌 결(texture)로 장식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시럽이 줄줄 흘러내리는 체리나, 미세한 흔들림에도 진동하는 젤리처럼, 가터벨트는 섹시한 여성의 소품 이상의, 특히 그것의 조임과 탄성(彈性)으로 더욱 자극적이다. 명작의 반열에 올릴 작품은 아닐지라도, 세대를 넘는 컬트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나인 하프 위크’는 분명 ‘강추’하고픈 영화적 일탈이다.

영화평론가

<알림>

새해 들어 락카페 지면에 새 연재물을 선보입니다. 월요일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위원들이 집필하는 ‘역사 속 사랑과 운명’을, 화요일은 영화평론가 김효정 씨의 ‘에로틱 시네마’를 게재합니다. 수요일은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이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를, 목요일은 주역학자 김승호 씨의 ‘운명을 경영하라’를 싣습니다. 금요일은 네이버의 연애·결혼 주제판을 운영하고 있는 문화일보 자회사 썸랩이 선정한 ‘금주의 커플&스토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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