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혁신없는 산업, 근본부터 바꿔라
‘기술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중국과 일본 기업들에 포위당한 산업현장의 형세가 세계 최대 첨단기술의 경연장인 소비자가전전시회(CES 2018)장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10일(현지시간) ‘CES 2018’이 열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내로라 하는 업체들만 입성할 수 있고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이른바 ‘명당’은 센트럴홀이다. 올해 CES에서도 이곳에 당당히 자리 잡은 삼성전자와 LG전자 전시관을 일본과 중국업체들이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시장에서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 같았다. 특히 중국업체들이 LVCC 중심부에서 한국 전자산업을 대표하는 양사 옆에 전시관을 나란히 마련한 것은 기술적으로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읽힌다.
① CES서 드러난 샌드위치 한국
센트럴홀과 거리 멀었던 중국
창훙·TCL·하이센스 등 포진
사우스홀은 中 벤처들이 점령
초라한 전시관 선보였던 일본
사업 포트폴리오 과감한 재편
스마트시티 등 첨단기술 선봬
삼성·LG外 주목 못받는 한국
4차산업혁명 경쟁 밀려날 위기
◇‘CES굴기’위상 높아진 중국 = 올해 CES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센트럴홀에 전진 배치된 중국업체들의 전시관이다. LVCC의 노른자 자리인 센트럴홀에는 가전업체 창훙과 TCL, 하이센스 등을 비롯해 통신업체 화웨이, 세계 1위 드론업체 DJI 등이 포진했다. 중국 최대 가전업체인 하이얼은 LG전자 바로 옆에 처음으로 대형부스를 차렸다. 센트럴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사우스홀에 둥지를 틀었던 불과 1∼2년 전의 모습과는 180도 달라진 풍경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한국 전자업계 인사들의 인식도 무거웠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새 CES에서 중국은 양적·질적 성장을 구가했다”며 “참가업체 수만 늘어난 게 아니라 전시장 부스 위치 등을 보면 CES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기술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하이센스는 삼성·LG전자가 공을 들이고 있는 자동차 부품 시장을 겨냥해 차량용 카메라 센서 등을 선보였다. 바이두는 이번 CES에 처음 참가해 인공지능(AI) 기반 자율주행차 시스템 ‘아폴로 2.0’과 대화형 AI 플랫폼 ‘듀어OS’를 적용한 스마트폰과 가전, AI 스피커 등을 공개했다. 창훙은 LG전자가 지난해 출시한 벽지처럼 얇은 ‘월페이퍼 TV’를 똑같은 모습으로 내놨다.
중국의 후방산업 지원군은 ‘인해전술’에 비견될 수준이다. 올해 CES에 참가한 전체 3900여 개 기업 가운데 30%가 중국기업이다. 중소기업들이 들어가는 사우스홀 플라자는 아예 수백여 개 중국 벤처업체들이 점령했다. 음성·얼굴 인식 등 세계 최고 수준 기술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AI 기업들은 ‘인해(人海)지능’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규모 육성되고 있다. 중국 음성 인식 분야를 장악한 아이플라이테크는 올해 CES에 처음 참가해 AI 통·번역 기술 등을 선보였다. 이 회사는 중국어를 영어·한국어 등 7개 언어로 실시간 통·번역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얼굴 인식 기술을 보유한 메그비 테크놀로지는 CES에서 모바일 기기에서 얼굴 인식으로 잠금을 푸는 기술 등을 선보였다.
◇‘메이드인 재팬’의 귀환 = 침몰하던 일본업체들도 중앙무대 복귀를 노렸다. 몇 해 전만 해도 구경거리 없이 초라한 전시관을 선보였던 소니와 파나소닉, 니콘 등 일본업체들의 부스도 확 달라졌다. 이들 업체 들은 전시구역을 7∼8개로 나눠 대형 전시관을 꾸렸다. 과감하게 재편한 사업 포트폴리오도 눈에 띄었다. 일본업체들이 정조준한 곳은 4차 산업 혁명 관련 시장이다.
적자의 수렁에서 허덕이던 파나소닉은 에너지와 자동차 전장부품업체로 변신했다. 파나소닉은 8개 전시구역을 스마트시티 구현에 필요한 에너지 시스템, 자율주행차 시스템, 차세대 배터리 등을 선보이는데 할애했다. 과거 파나소닉을 먹여 살렸던 주력제품인 TV와 비디오 음향 기기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파나소닉의 자율주행시스템이 탑재된 콘셉트카는 관람객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최근 메모리 반도체 지분을 매각한 도시바는 이번 CES에서 아마존 알렉사와 손잡고 구현한 스마트홈을 선보였다.
스마트폰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걸었던 니콘과 카시오, 후지필름 등도 반전을 꾀했다. 니콘은 최첨단 카메라 로봇 촬영을 시연했고, 촬영 콘텐츠를 가상현실(VR)로 체험하는 공간도 마련했다. 우주광학 기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공간도 따로 마련했다. 소니는 자율 주행차 부품 시장 진출을 선언하면서 AI를 적용한 로봇강아지 ‘아이보’를 선보였다.
이는 ‘전자산업의 종가’에서 밀려났던 일본업체들이 부활한 모습과 유사하다. 회생 비결은 원천기술력이다. 전시장을 함께 둘러본 전자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콘텐츠와 원천기술력이 막강한 일본이 주력업종까지 버리는 구조조정을 발판으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4차산업 경쟁력은 떨어지고 CES 부스 채울 기업도 부족한 한국 = 최첨단 기술을 경합하는 CES에 참가한 중국업체는 1300여 개다. 반면 한국기업 중 명함을 내밀 만한 곳은 삼성전자와 LG전자 두 곳에 불과하다. 올해 한컴그룹, 코웨이 등 몇몇 기업이 참여했지만 시장에 의미 있는 제품을 들고나온 곳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사실상 경쟁국 기업들의 부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기업들조차 없다는 얘기다.
기술 기반 기업들이 적다 보니 4차 산업 경쟁력도 뒤처진 양상이다. 최근 전 세계 이동통신사들이 상용화 경쟁을 벌이는 5세대(G) 이동통신이 일례다. 5G는 자율주행차 시스템과 AI를 매끄럽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필수다. 기반 기술인 5G 경쟁에서 밀리면 4차 산업 혁명도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5G 기술에서는 중국이 한국을 추월했다는 우려도 나왔다.
CES 현장을 찾은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이동통신 4G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이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며 “오히려 우리가 기술격차를 걱정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박 사장은 “이번 CES에 기업이 가장 많이 참가한 나라가 중국이고, 선전(深) 한 도시에서만 참가한 기업들이 다른 나라보다 많다”며 “기술 격차를 줄이고 혁신을 따라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 과제”라고 덧붙였다.
라스베이거스=글·사진 권도경 기자 kw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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