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리에서 길어 올린 인문학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없는건 돈 아닌 사람
가난하면 경제적 결핍 힘들고
부자는 정서 결핍에 압도당해
내 부족함을 먼저 생각해야
비로소 緣맺을 준비가 된 것
2005년 노숙인 인문학을 필두로 지역자활센터와 교도소에서 속속 인문학 강좌가 개설됐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문학은 다양한 경로로 널리 퍼져 어느덧 친숙한 학문이 되었다. 지난 시간, 거리에서 혹은 교도소와 복지관에서 인문학을 매개로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즉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한다.
인문학의 정의는 다양하다. 삶의 의미를 궁구한다는 일반적인 정의에서부터 우주의 기원과 질서를 탐구하는 것, 시민의 자유와 책임을 일깨우는 것, 사물을 보는 새롭고 다양한 시각을 갖기 위한 학구적 태도, 생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학문이라는 등의 정의가 있다. 노숙인 인문학을 시작하면서 인문학의 일반적인 정의를 대신할 새로운 의미를 생각했다. 거리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했다. 흔히 노숙인은 돈이나 집, 직업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노숙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에겐 집과 직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없는 건 사람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위급한 상황에 놓여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 그게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거기서 노숙인의 새로운 정의를 이끌어 냈다. 노숙인은 돈, 직업, 집이 없는 사람이기 이전에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노숙인, ‘사람이 없는 사람’ = 노숙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우선 사람의 의미, 사람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야 했다. 거기서 길어 올린 인문학의 의미는 그래서 ‘사람을 알기 위한 공부’였다. 사람을 뜻하는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사람 사이’ 즉, ‘관계’를 의미한다. 삶이란 무수한 관계의 총체이면서 다양한 인연(因緣)의 과정이다. 사람 관계의 중요성은 고 신영복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을 통해 확인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이식된 서양의 ‘존재론’을 극복하고 동양의 고유사상인 ‘관계론’을 회복하는 것이 21세기 인문학 시대의 요체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관계는 곧 인연이다. “인연이라는 말에서 ‘인’은 ‘근원’이라는 뜻으로 내적인 것이다. ‘인’이 내적인 것이라면 ‘연’은 외적인 것이다. 내적 조건인 ‘인’과 외적 조건인 ‘연’이 결합해서 모든 것이 생겨나고, 이 결합이 해소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불교의 ‘인연’이다. 한 인간의 삶은 인연에 지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것, 가까운 친구에게서 배운 것, 또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체험적 지식 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덩어리로 자기 자신 속에 축적되어 ‘인’을 만든다. 그 ‘인’이 ‘연’을 얻어서 그 사람의 희망이 되고, 행동이 되고, 결단이 되고, 길이 만들어진다.”(히로나카 헤이스케, ‘학문의 즐거움’ 중)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인’은 충만한데 ‘연’이 닿지 않아 일이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치고 ‘인’에 충실한 사람이 드물다. 내 부족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연’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이다. 사람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다루게 된 것이 사람의 특성을 살피는 것이었고, 그중 사람은 누구나 결핍의 존재라는 주제였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결핍을 가지고 있다. 결핍은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 결핍에 시달린다. 부자라고 해서 결핍이 없을 리 없다. 돈에 대한 집착이 그 외의 삶의 가치를 압도하는 데서 오는 정서적 결핍 역시 심각한 결핍이다. 인간의 역사는 저마다의 결핍을 극복해 온 과정이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역시 결핍을 극복한 사람이다. 결국 삶이란 끝없이 자기 안의 결핍을 마주하는 과정이다. 결핍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사람을 이해하는 코드로서 관계와 인연, 결핍을 이야기했다. 거리의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사람 관계의 회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관계와 인연, 결핍을 읽는 일은 더없이 중요한 과정이었다. 다시 인문학이란 사람을 알기 위한 공부이며, 앎은 소통을 통해 이뤄진다.
◇사람을 이해하는 코드…관계 그리고 결핍 = 초창기 노숙인 인문학에서 길어 올린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무엇이 삶을 이어가게 하는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강의에서 만난 노숙인 중에 이따금 돈을 꿔달라고 부탁하는 분이 있었다. 돈거래는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금기시하는 것이지만 그에게는 왠지 그런 걸 따지고 싶지 않았다. 기대대로 이듬해 그는 빌려간 돈에 이자까지 더해 돌려주었다. 그와 함께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대화했다.
“운전기사를 모집한다는 벽보를 보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운전면허가 정지된 상태였지만 그만큼 절박했던 거죠. 차주를 설득해 대형면허를 딴 뒤 운전을 시작했어요. 일을 시작한 뒤 개인회생도 신청했고요.” 운전면허도 없이 운전 일에 도전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냐고 묻자 그가 인문학 이야기를 꺼냈다. “강의 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소개하셨잖아요. 거기 나오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죠. 결혼을 앞둔 딸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지 말자.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아빠가 되자. 그러려면 못할 일이 없다. 그게 저의 ‘삶의 의미’이고, ‘살아야 할 이유’였지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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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은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당선. 2005년 성프란시스대학(최초의 노숙인 인문학 강좌)에서 강의를 하며 ‘거리의 인문학자’로 불림. 이후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 동국대 CEO인문학 등에서 강의. 지은 책으로 ‘동사의 길’ ‘동사의 삶’ ‘최준영의 책고집’ ‘결핍을 즐겨라’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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