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꿈꾸며 맹훈 갈비뼈 금 가
의사 휴식 권유 무시 폼 망가져
피땀 노력 덕 아마 고수로 성장
베스트 4언더 홀인원 3차례나
38년 ‘돈버는 일’ 미련없이 떠나
색소폰 동호회 등 취미생활 즐겨
모교 50억 쾌척·고학생 후원 등
세월호 유가족 돕기 팔걷기도
전경수(72) 한국고도부키㈜ 고문은 은퇴 후 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 고문은 “평소 꼭 해보고 싶던 것을 하니 돈을 벌 때보다 더 재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 고문은 색소폰 동호회 모임이 있던 지난 11일 경기 용인시 수지에서 차를 몰고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건물 지하 연주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만난 전 고문은 동호인들 사이에 ‘남들이 10년 배운 것을 3년 만에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우등생’으로 통한다. 그는 색소폰 입문 3년 만에 250곡을 연주할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전 고문은 올해 골프에서도 ‘에이지 슈터’를 목표로 삼았다. 10여 년 전, 4언더파 68타까지 작성했던 전 고문은 지난해 가을 75타를 챙겼을 만큼 여전히 출중한 기량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인들과 ‘전지훈련’을 위해 동남아로 골프 여행을 계획했다가 최근 허리협착증 시술을 하는 바람에 잠시 골프채를 손에서 내려놨다.
전 고문은 군에서 복무하던 23세 때 골프에 입문했다. 부산의 한 보안부대에서 복무했던 전 고문은 어느 날 부산 출신의 동기 집에 들렀다. 기업을 운영하던 동기의 부친은 “골프를 배워두면 앞으로 사회 나가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며 전 고문에게 골프채를 선물했다. 전 고문은 외출, 외박을 나와 동기와 함께 골프연습장을 다니면서 그 골프채를 휘둘렀다. 제대 후 서울 명동의 한 연습장에 한 달쯤 다녔고, 지금의 어린이대공원에 있던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라운드를 즐겼다. 이곳에서 박종규, 이후락 등 당시 권력자나 지금은 타계한 대기업 오너들과 자주 동반하는 행운도 누렸다. 당시만 해도 20대 나이에 골프 치는 게 드물었기에 동반한 ‘어르신’들이 드라이버 샷을 펑펑 날려대던 그를 무척 예뻐했다.
전 고문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평생 돈 버는 일을 딱 두 가지만 했다. 그는 1970년대 말 창업한 ‘공간 인테리어㈜’를 21년 동안, 한일합작회사 ‘한국 고도부키㈜’를 17년 동안 경영한 뒤 미련 없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전 고문이 몸담았던 두 회사는 자신의 전공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회사의 시작은 일면식도 없던 은인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출발했다. 전 고문이 공간 인테리어를 창업한 건 건축가 김수근 교수를 만났기 때문. 지방 부농 아들이던 전 고문은 1968년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지만, 유신 독재에 맞서 학생운동에 참여해 수배를 받자 산으로 돌아갔다. 점차 등산에 빠지면서 히말라야 마나슬루 원정을 3차례나 다녀왔다. 특히 두 번째 원정에서 눈사태로 대원 15명을 잃었고, 동료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3차 원정길에 오른 뒤 등반을 접었다. 이후에는 무동력 요트로 태평양 횡단에 도전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기상악화로 48일 만에 꿈을 접고 부산항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요트에 흠뻑 취해 있던 김수근 교수가 전 고문을 가까이 뒀다. 김 교수는 소공동 반도 아케이드 부지에 롯데호텔 건설 실시설계에 참여했을 때 전 고문에게 인테리어 작업을 맡겼다. 도면조차 볼 줄 몰랐던 그는 김 교수의 조언을 받아가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다. 훗날 남산 하얏트호텔 등 특급호텔 공사를 도맡았다. 전 고문은 1997년 여름 다른 사업을 위해 갑자기 회사를 매각했고, 몇 달 뒤 터진 외환위기를 피해갈 수 있었다.
1년여를 소일하던 전 고문은 유럽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던 비행기에서 옆자리의 한 일본인과 10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 고도부키사의 후카가와 사키유키 회장이 인테리어업을 해온 전 고문에게 사업을 제안했던 것. 1912년 창업한 고도부키사는 콘서트홀이나 공연장의 의자 등을 제작하는, 연 매출 7조 원 수준의 큰 기업이었다. 공연장 음향 등 기능을 고려해 수제로 의자를 만들기에 가격은 개당 100만∼300만 원이나 된다. 전 고문은 1년여를 고민하다 합작회사를 설립해 예술의 전당, 롯데콘서트 홀 등 국내 최고의 공연장에 의자를 납품했고 한때 연 650억 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전 고문은 2015년 초 ‘이젠 쉬면서 취미생활을 하고 싶다’고 은퇴할 뜻을 비쳤다. 일본 본사에서 ‘고문’직이라도 유지해 달라고 간청해 가끔 회사로 출근한다.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전 고문은 따뜻한 마음을 담아 어려운 이웃을 위한 기부활동도 펼치고 있다. 10여 년 전 형편이 어려워 학업 포기를 할 뻔한 대학생 2명을 후원한 것을 계기로 8년 전엔 모교인 연세대에 50억 원을 내놓았다. 대구 계명대에서 음악 홀 공사를 진행하면서 일과는 별개로 장학금을 건네기도 했고,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임시직 교사 유가족에게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전 고문은 프로가 되려고 준비한 적이 있다. 1년 가까이 연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하루에 3000∼4000개의 공을 치다가 피로 누적으로 갈비뼈 3개가 한꺼번에 금이 갔다. 무조건 쉬라는 의사의 권유를 흘려 버리고 아픈 몸으로 계속 공을 쳤다. 팔만으로 공을 치니 스윙 폼이 망가져 전형적인 주말골퍼가 됐다. 이때 열심히 운동한 게 든든한 밑천이 됐다. 한 라운드 2개의 이글을 뽑아내는 등 지금까지 이글만 60여 차례가 넘고 언더파 기량으로 클럽챔피언에도 도전했다. 한성골프장에서는 6개 홀 연속으로 버디를 잡기도 했다. 한창때에는 파 5홀에서 5∼6번 아이언으로도 2온을 노리기도 했다. 지금도 드라이버로 200야드를 보내 또래에서는 여전히 장타자로 군림하고 있다. 1987년 제헌절 공휴일 때 태광골프장 5번 홀(파3) 165m 내리막에서 7번 아이언으로 친 볼이 바로 홀로 들어가 첫 홀인원의 기쁨을 안았다. 하와이 왕복 항공권 일등석 2장을 부상으로 받았고 이후 서원밸리(1998년), 제주 오라골프장(2001년)에서 두 차례 더 행운을 안았다. 전 고문은 “골프를 하다 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만, 사실 궂은일이 더 많이 생긴다”면서 “궂은일,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는 게 골프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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