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 커피숍 차린 이상규 보드니아 대표
대기업 월급쟁이 홍보맨 20년
문득 “난 어디로 가나” 회의감
사표 내고 로스팅부터 배워
서울생활 접고 속초간다 하니
주위에선 “왜 무모한 짓을…”
모두가 안된다고 할수록 확신
초기자본 1억 가지고 점포얻어
하루 두 번씩 커피 볶으며 연구
단골 늘어나… 진정성 통한 것
6년만에 호숫가 앞 ‘내 커피집’
성균관대 국문과 87학번 이상규(50) 씨. 이 씨는 최근 6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1987’의 주역 세대다. 30년 전 대학 시절을 생각해보면, 뿌연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세상 같다. 명색이 학생이란 사람이 제대로 강의를 들은 기억이 없다. 바깥은 항상 어수선했고, 캠퍼스 안은 울분에 갇혀 있었다. 학생들은 강의실보다 동아리방과 막걸리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때론 선배들을 따라 구호를 외치고 때론 시위에 몸을 던졌다.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다가 졸업이 닥쳤고 이 씨는 운 좋게 대기업에 취직했다. 대우자동차 홍보맨. 학생 때와는 생활이 180도 달라졌다. 몸이 처한 환경이 바뀌니 생각도 변했다. 학생 때의 높았던 이상은 어느새 흐릿해지고 당장 닥친 업무 해결에만 열정을 쏟았다. 다행히 홍보 업무가 제법 몸에 맞았다. 실력을 인정받아 10년 뒤에는 CJ CGV 홍보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홍보팀장까지 지내며 또다시 무난히 10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회의가 들었다. 대기업 생활 20년,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씨는 결국 월급쟁이 생활 20주년이 되던 2012년 2월 말 가슴속에 품었던 사직서를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커피 로스팅(roasting)의 명인으로 알려진 전광수 마스터를 찾아갔다. 늘 직장생활을 그만두면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해보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침 그쪽에 아는 친구가 있어 소개를 받았다. 특별한 준비 없이 사표부터 던지고 나온 것치곤 운이 좋았다. 로스팅과 핸드드립(hand-drip) 등 커피의 기본기를 배우면서 커피 브랜드 ‘보드니아(Bothnia)’를 설립했다. 그리고 꼭 1년 뒤인 2013년 3월, 강원 속초에 로스터리 커피하우스 보드니아를 열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커피 하는 친구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있어서 회사를 그만두면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사직서부터 내고 커피를 배우기 시작한 거죠. 평소 커피를 좋아하는데 로스팅, 그라인딩(grinding), 핸드드립 등을 익히고 다양한 커피 맛을 보면서 뒤늦게 ‘아, 이걸 가지고 평생을 연구해도 괜찮겠구나’ 하는 확신이 든 거예요. 그래서 커피 공부와 동시에 카페 오픈을 준비했습니다.”
이 씨가 커피숍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이미지는 호숫가의 한적한 카페였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커피를 통해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공간. 로스팅에 관한 한 고집이 있는 작아도 개성 있는 커피하우스.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간 적이 있어요. 잘츠부르크주 잘츠카머구트에 기가 막힌 풍광의 몬트제(Mondsee)라는 호수가 있는데 오랫동안 그곳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몬트제는 달의 호수라는 뜻이에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곳이죠. 지금 여기, 속초 영랑호가 제게 딱 그런 느낌이에요. 이미지를 현실화한 셈입니다.”
“주변에서 너무 반대하니까 오히려 제 생각은 더 확고해졌어요. 몬트제의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이 일은 내 적성에 딱 맞는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어요. 스스로 빠져나갈 길이 없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이 씨는 2012년 수없이 속초를 오가며 사업계획을 구체화했다. 서울엔 각종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많았지만 속초엔 드물었다. 특히 그가 하려고 하는 로스터리 전문 커피숍은 2개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원두커피나 블렌딩 같은 고급스러운 커피를 즐기려는 문화가 싹트고 있었다. 인구는 8만 명에 불과하지만 설악산과 속초의 아름다운 해변과 호수를 찾는 관광객이 연간 1000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000만 명 중 0.1%만 공략해도 성공이라는 계산이 섰다.
“대기업 생활 20년이라지만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초기 자본을 최소화했습니다. 1억 원쯤이었어요. 혹시 잘못돼도 바로 엑시트가 가능한…. 서울이 아니니까 점포 권리금 같은 건 없었고, 월세나 인테리어에 돈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커피와 관련된 장비와 재료를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이제는 제 보물 1호가 된 로스팅 머신 ‘프로바트(Probat)’는 3000만 원도 넘어요. 그라인더나 에스프레소 머신도 값비싼 수동 제품으로 구매했어요. 로스팅할 때 자신이 생각하는 맛이 안 나오면 기계 탓을 하기 쉽거든요. 좋은 기계를 쓰면 다 제 잘못이니 개선의 여지가 있었죠.”
이 씨는 처음엔 속초의 관광명소인 중앙시장 인근에 카페를 차렸다. 경치 좋은 해변은 아니었지만 유동인구가 제법 되는 큰길가였다. 중앙시장을 찾는 현지인과 관광객을 타깃으로 했다.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처음엔 손님이 들어오면 겁부터 났다. 로스팅, 그라인딩을 거쳐 핸드드립까지 하는 동안 손님을 적막 속에 기다리게 하는 게 곤욕이었다. 마음만 급할 뿐 손발이 따로 놀았다. 커피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해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생두를 볶다가 태우고,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추출하다가 흘리는 실수는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 씨를 붙잡은 건 처음 품었던 마음 두 가지. “커피는 평생 연구하고 매달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 그리고 “진정성으로 승부하자”는 우직함.
“매일 아침과 저녁 두 번 커피를 볶아요. 한 번 볶을 때 1시간 30분 정도 걸리죠. 로스팅할 때는 제 작업실(로스팅 랩)에 들어가 꽤 공을 들입니다. 매일 하는 거지만 생두의 상태와 불의 온도 등을 수시로 점검하며 최상의 원두를 추출하려고 하죠. 로스팅은 마치 수학 공식 같아요. 저 유리 벽에 흰 글씨로 쓴 것도 낙서가 아니라 로스팅의 화학식입니다.”
이 씨는 크게 두 가지 메뉴를 구성해 놓고 있다. 하나는 원두 산지의 맛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싱글 오리진, 다른 하나는 이 씨가 직접 개발한 하우스 블렌딩. 보드니아에서는 총 10종의 싱글 오리진과 8종의 하우스 블렌딩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하우스 블렌딩에는 ‘북해의 별’ ‘숲의 시계’ ‘달의 호수’ ‘바위의 꿈’ 등 호기심을 유발하는 작명까지 했다.
“이렇게 하니까 점점 단골이 늘어났어요. 제가 만든 커피의 진정성을 알아주신 거죠. 단골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그분들이 저와 보드니아의 꿈을 만들어 주신 겁니다.”
자신감을 얻은 이 씨는 내친김에 자신의 점포를 차리는 시점을 앞당겼다. 원래는 10년 뒤를 바라보고 월세로 시작한 것이었으나 지난해 1월 영랑호가 코앞에 펼쳐져 있는 지금의 아늑한 공간으로 이전했다. 대지 495㎡(150평)에, 건평 99㎡(30평)의 2층 건물. 창가 좌석에 앉아서 영랑호를 바라보며 한가로이 커피를 즐기기에 이곳보다 편안한 곳이 없어 보인다. 영랑호 건너편으로 배경처럼 펼쳐진 설악산의 웅장한 자태는 보너스다.
“2017년 1월에 이곳으로 왔으니 이제 꼭 1년이 됐네요. 처음엔 이렇게 빨리 제 점포를 차릴지 몰랐어요. 일단 월세로 하면서 10년 뒤를 바라본 거죠. 직접 해보고 살아보면서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단골이 많이 생기면서 아예 집과 점포로 같이 쓸 만한 장소를 마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휴일에는 아내와 함께 속초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땅을 보러 다녔어요.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여기예요. 영랑호의 가장 안쪽 끝인데 그때만 해도 황무지였어요. 주위에 아무것도 없었고, 밤이면 인적이 드물어 무서울 정도였죠. 아내는 처음엔 울면서 이곳에 왔어요. 2층 건물을 지어준 친구도 걱정했어요. 하지만 단골을 떠올려봤어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서울 집까지 처분해서 아예 속초에 뿌리를 내렸죠. 이젠 단골뿐만 아니라 관광객으로 와서 들렀다가 좋아서 일부러 서울에서 오시는 분도 많아요. 속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택시 타고 영랑호 보드니아에 가자고 하면 많이들 아십니다. 이제 자신 있습니다. 하하.”
속초 = 글·사진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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