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통쾌하게 하면 폐단이 생긴다. 여러 신하는 모름지기 이를 명심하여 통쾌함(快)이라는 한 글자를 마음에 두지 말라.”
1755년 봄 62세의 국왕 영조(英祖)가 던진 이 말은 자책에 가까웠다. 즉위 초의 정적 제거 과정에서 부닥쳤던 대규모 반란을 교훈삼아 반대 당파를 최대한 포용했던 그였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지 이미 3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비방한다는 보고에 영조는 대로(大怒)했다.
국왕의 대로는 금세 노론 집권자들에게 전이돼 이용되었다. 집권자들은 국가의 권력 기구를 총동원해 비방 대자보를 쓴 세력 및 그 가족들을 체포, 처형했다.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까지 줄줄이 끌려와 고문당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이 따르던 붕당을 비판해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정치적 마녀사냥으로 격화돼 가는 정국에 제동을 건 것은 국왕 영조였다. 자식을 고문해 그 아버지의 역모 혐의를 캐묻자는 신하들의 요청을 들은 그는 ‘아차’ 했다.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지양해왔던 보복정치의 덫에 다시 걸렸음을 인지하고 ‘역모정국’의 중지를 선언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보복정치라는 정치적 회오리바람이 갖는 파괴력이다. 이 바람은 엄청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불기 시작하면 끝 간 데를 모른다. 태종이 세종의 장인까지도 모조리 제거한 것은 그 회오리바람의 속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후계자인 세종이 ‘손에 피 묻히는 일’의 악순환에 휘말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러지 않으면 애당초 성과를 거두는 정치(成效之政)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정치의 본론’, 즉 성과 거두는 정치를 향해 성큼 걸어갈 수 있었다. 취임사에서 그는 ‘찬승비서(纘承丕緖)’, 즉 태조와 태종이 쌓아놓은 전통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갈고 닦아온 정치적 업적을 계승할 때 신뢰를 얻고, 거기서 더 나아가는 국정을 펼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세종은 자신을 계승 군주로 자리매김하곤 했다. 가령 재위 중반부에 신하들이 북방영토개척을 반대하자 그는 부왕 태종을 거론했다. 두만강이라는 천혜의 국경선을 지키려던 부왕의 뜻을 계승한 것일 뿐 새로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백성들의 의구심과 저항을 넘어서고, 곧바로 국가사업에 착수하게 하는데 ‘이어서 한다(紹述)’는 말보다 효과적인 게 없다는 게 세종의 판단이었다. 실록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영조가 만약 ‘통쾌한 정치의 위험성’을 자각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최대 업적으로 불리는 균역법과 청계천 준천은 가능했을까? 태종이 ‘손에 피 묻히는 일’로부터 후계자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세종치세는 어찌 되었을까? 역사의 교훈은 크고도 무겁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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