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섹스리스 남녀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년·감독 로브 라이너·사진)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주인공이 대낮에 식당에서 온몸을 꼬며 신음을 토해내는 ‘가짜 오르가슴’ 장면이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구태의연하다. 친구로 지내던 남녀가 결국 사랑에 빠져 백년해로한다는 설정은 수많은 로맨틱코미디에서 차용되고 반복된 클리셰가 아닌가. 그럼에도 이 영화는 경전으로 쓰고 싶을 만큼 영리하고 위트 있는 대사들로 그득하다.

막 대학을 졸업한 샐리(멕 라이언)는 해리(빌리 크리스털) 애인의 친구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샐리와 해리는 비슷한 시기에 뉴욕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샐리의 차로 함께 뉴욕에 가게 되며 시작된 두 사람의 동행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고문 같은 여정이 된다. 마초적이고 무심한 해리와 섬세하고 감성적인 샐리는 매 순간 악다구니를 쓰며 싸운다. 두 사람은 특히 ‘남자와 여자가 플라토닉한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지리멸렬한 주제에 핏대를 세우고, 세상의 온갖 담론을 갖다 붙여 반대(해리)하고, 찬성(샐리)한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해리와 샐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간다. 그 후에도 어쩌다 맞닥뜨리기만 하면 말싸움으로 번진다. 서로에게 떼버리고 싶은 실밥 같은 존재지만 공항, 뉴욕 귀퉁이의 가게 등에서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숙명적 인연이기도 하다. 5년이 흐른 어느 날, 두 사람은 맨해튼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카페로 자리를 옮긴다. 낡은 테이블에 앉아 처음으로 서로의 연애, 일에 대해 싸움 없이 대화를 이어가는데 이 장면이 꽤 살갑다. 해리는 이혼했고 샐리는 실패한 연애로 하루하루가 곤욕인 상태라서 그런지 커피잔 너머에 있는 ‘원수’가 반백 년을 함께한 죽마고우처럼 느껴진다.

나누는 통화가 길어지고 만남이 잦아지며 해리와 샐리는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가 돼 가지만 남녀 간 우정을 이어가기 위한 룰인 ‘섹스 금지’는 가까스로 지켜나간다. 심장이 뛰는 순간이 올 때마다 그들은 애써 먼 산을 바라보며 마음속 불씨를 끈다. 한 유명 식당에 간 두 사람은 어김없이 남녀, 정확히 말하면 섹스에 대한 공방을 벌인다. 샐리는 여자가 잠자리에서 오르가슴을 연기해도 남자는 알아채지 못할 것임을 주장하고 해리는 늘 그렇듯 반대다. 정색하는 해리가 못마땅한 샐리는 표정을 가다듬고 “오!” “예스!”를 내지른다. 샐리의 탄성이 식당 안으로 퍼져나가면서 모든 손님의 시선이 샐리에게 향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깨물며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샐리의 오르가슴 연기는 아연실색한 해리와 식당 손님들을 설득하고 만다. 샐리를 지켜보던 한 여자 손님이 “저 여자가 먹는 걸 나도 먹겠어요”라고 말하는 대사는 미국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선정한 ‘미국 영화 100년, 명대사 100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평론가
해리는 샐리의 오르가슴 연기에 마음이 흔들린 걸까. 두 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마음의, 육체의 거리를 좁혀간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그들은 드디어 ‘일’을 낸다. 해리는 헤어진 옛 애인이 결혼한다며 전화 너머로 통곡하는 샐리의 아파트로 단숨에 달려간다. 눈물로 범벅이 된 샐리를 달래주려 한 한 번의 키스가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지고 결국 수년간 지켜온 금기가 무너진다. 자신의 욕망이 부끄러운 해리는 샐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잠시 잠적하지만 새해 첫날이 끝나기도 전에 이들은 서로의 반려자가 될 것을 약속한다. 매 장면 감정과 대사의 과잉으로 넘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구성하는 문학적인 문장과 발랄한 유머로 시종일관 유쾌한 느낌을 전한다. 물론 영화의 중추는 배우들이다. 96분의 러닝타임을 1980년대를 관통하는 섹스 조크로 넉살 좋게 채워내는 멕 라이언과 빌리 크리스털은 이 영화로 한 세대를 지배하는 스타가 됐고, 30년이 흐른 지금도 이 작품은 재개봉을 기다리는 수많은 이의 연대(連帶)적 의식이 됐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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