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영 한림대 교수 정치학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밝혔다가 4시간 만에 ‘대변인 실수’로 물렸다. 같은 시기에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의 초안을 공개했는데 거기서도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로 대체됐다.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의 ‘태극기 실종’과 함께 대한민국 정체성이 흔들리는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공개된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초안)으로 보면, 앞으로 중고등 학생을 편협하고 경도된 역사관(歷史觀)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가 확연하다. 6·25전쟁에서 북한의 ‘남침’ 부분을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흐려버렸다.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냉전 시기 미국 외교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등장한 수정주의는 역사적 사실도 외면한 사회주의 편향성 때문에 이제 더는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1950년 6·25 직전 김일성이 전쟁을 허락받기 위해 스탈린을 비밀리에 방문한 뒤, 귀국길에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무력통일계획’을 밝힌 것을 보고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비밀외교 문서들이 공개됨에 따라 6·25 전쟁이 남북한의 내전적(內戰的) 갈등에 근본 원인이 있는 게 아님이 밝혀졌다. 국제적으로 정통 사관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영토 야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남침’을 서술하지 않게 되면 이들의 전쟁 책임이 사라진다. 즉, 17만 명의 국군과 유엔군 전사자, 24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 370만 명의 이재민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이 면제된다.

대신, 박정희의 업적은 정교하게 지우고 문제점만 부각시킨다. 경제성장을 ‘일국적 시각에 가두지 말고 세계 경제 변동 과정에서 어떻게 가능했는지 파악한다’고 했다. 이 부분 역시 세계 주류 경제학계 이론과는 거리가 먼 조잡한 ‘세계체제론’에 근거해 주변부 한국은 중심부의 필요에 따라 수출시장 개방과 외화 차입으로 착취적 성장을 이뤘다는 내용이다. 박정희의 ‘강력하고 실천적인 리더십’을 지우기 위해 ‘우수하고 근면한 노동력’까지 빼고 경제성장이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새마을운동도 빼버렸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에 남과 북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균형감각의 상실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집필 시안의 ‘소주제’에 따른 ‘학습 요소’를 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북한 정부 수립’을 동등하게 서술하고, ‘반공주의와 독재’를 ‘북한의 사회주의 독재 체제’와 함께 서술하게 지도하고 있다. 결국,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과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동일하고, 남한의 독재는 북한의 독재와 다르지 않다는 서술을 하라고 안내하는 지침이다. 어떻게 대한민국이 봉건왕조식 김 씨 3대 세습독재와 동등한 수준일 수 있는가?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편향된 시안조차 어기고 더 좌편향적인 역사교과서를 제출하고 나서 시정명령조차 제대로 따르지 않은 채로 배포되는 것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한 연설에서 한국의 경제개발과 민주화 경험을 세계 각국을 다닐 때마다 소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세계 지도자들의 한국 배우기 열풍에 놀랄 때가 많다”고 했다. 중고등 학생들이 자학적 역사관에 근거해서 쓰인 역사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자랑스러운 과거를 배워야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될 수 있다. 교육부는 이제라도 역사교과서의 ‘정치화’를 과감히 떨쳐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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