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세종26) 2월 30일 저녁 무렵 세종 일행은 경기도 죽산현 천민천 가에 도착했다. 한 달 전쯤 어떤 사람이 궁궐에 찾아와서 “청주에 가면 초수(椒水)라는 곳에 후추(胡椒) 맛 나는 물이 있는데, 그 물로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신하들은 당시 안질(眼疾)로 고생하던 왕에게 질병 치료를 위해 행행(幸行:임금이 가는 곳에 백성들의 기쁨이 함께 간다)하시라고 강권했고, 세종도 큰맘 먹고 남행을 결정했다.
불과 이틀 만에 국왕 일행이 경복궁에서 170여 리 떨어져 있는 죽산현 천민천에 도착해 여장을 펼 수 있었던 것은(2박) “이번 초수행은 간편하게”라는 왕명 덕분이었다. 남행 첫날 어가(御駕) 앞에서 원통함을 아뢰는 85세 되는 노인의 말을 듣고 조치해준 것을 빼면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셈이다. 조선 후기에 정조가 서울에서 90리 떨어진 수원 화성까지 가는 데 이틀 걸린 것을 생각해보면 세종의 행행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사흘 째 되는 날(3월 1일)에는 속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숙영지인 충청도 진천현 북평천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3박). 금강(錦江)의 물줄기가 진천현을 휘감고 있어서 강을 건너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첫날 100리를 주파한 데 이어(2월 28일, 경기도 양지현 남평에서 1박), 이튿날은 70리 길을 갔고(2월 29일 죽산현 천민천에서 2박), 사흘째는 60여 리로 점점 속도가 떨어진 것이다(3월 1일, 충청도 진천현 북평천에서 3박). 나흘째 되는 3월 2일에, 세종 일행은 다시 60여 리를 더 내려가 드디어 초수리에 도착했다. 왕, 왕비, 세자는 물론 수행한 신료들도 모두 고단해 바로 취침에 들어갔다(4박).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행행의 일차적인 목적이 왕의 눈병 치료였기 때문에 이튿날부터 질병 치료가 본격 시도됐다. 하지만 광천수로 눈을 반복해서 씻어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안질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은 것 같다. “내 생각에 (안질이) 그전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다”는 세종의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세종 일행이 그곳까지 가서 두 달 간(3월 2일∼5월 2일)이나 머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훈민정음 막바지 작업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초수리로 출발한 때(1444.2.28)는 정음 창제 사실이 알려진 지(1443.12.30.) 두 달이 지난 때였고, ‘운회’를 번역하도록 지시한(1444.2.16) 13일 후였다. 그때는 또한 신숙주·성삼문 등을 요동으로 보내 해외 학자에게 자문하기(1445.1.7) 11개월 전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초수리 행차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그것을 언어학적으로 실험하고 고증을 거치며, 시행 방안을 궁구하는 시기에 놓여 있었다. 때마침 문자 창제에 깊숙이 관여한 정인지도 삼도(충청 경상 전라) 순찰사로 그곳에 와서 합류했다.
놀랍게도 초수리 거둥과 한글 창제를 연계시켜 말한 것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였다. 최만리는 유명한 언문창제 반대상소에서 “이번 청주 초수리 거둥 때 (…)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꼭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닌데, 어찌 이것을 행재(行在:행궁이 있는 곳)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옥체 조섭을 번거롭게 만드십니까?”라고 비판했다.
서울에서 290여 리 떨어진 청주 초수리(초정)까지 와서, 신병 치료는 제쳐놓고 새로 개발한 엄청난 창조성과(훈민정음) 마무리에 몰입하는 세종을 보면서 일 중독 리더를 연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야트막한 야산과 논밭 사이의 행궁 주변을 둘러보면서, 밤낮을 잊고 소명 완성을 위해 막판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열정에 감동했다.